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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의 작가, 김도희

 

 김 원 방

 

 

1. 김도희라는 작가, 말하자면 '정적 뒤에 감추어진 과격한 삶'으로부터

 

2006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김도희가 보여준 작업은 온통 우울증적 정서와 불안감이 가득 찬 작업이었다. 인간주체의 정신을 지배하는 한 축이 프로이트적 쾌락원칙(즉 쾌락을 적절한 한계 내에서 유지함으로써 주체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본능)이라면, 김도희의 작업은 다른 축, 즉 쾌락원칙의 경계를 넘어 삶의 극단적 지점에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죽음충동과 극단적 불안에 의해 추동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이번 개인전 제목으로 제시한 '이상한 가역반응'(Strange Reversible Reaction)은, 두 가지 물질 사이에 발생하는 화학반응에 있어 정반응과 역반응의 속도가 같은 나머지, 겉보기에 반응이 중지된 듯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에서는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에 구성되는 심리적 상황이 겉으로는 무덤덤한 정적에 싸여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과도한 자의식, 허망함, 죽음의 예감 같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다. 가역반응이라는 전시주제는 그러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과격한 실존의 양상을 함축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2. '내적 체험'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히스테리적 담론

 

이번에 전시한 작업은 아니지만, 2003년 작업인 <신치로이드 60> 그리고 2011년 5월에 인사미술공간 개인전 때 행한 작업인 <콘크리트 시계>를 살펴보면, 그녀의 작업을 낳는 내적인 동기와 관심사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신치로이드 60>은 오랜 전부터 갑상선 이상을 앓고 있는 작가가 약물을 끊은 채 한달간 이불 크기의 장지 한장 만 깔거나 덮으며 고통스럽게 생활한 후, 그 흔적인 장지를 전시한 작품이다. 또 <콘크리트 시계>의 경우는 인사미술공간 내에 약 2평 남짓한 비좁은 공간을 지정해서, 이 공간을 벗어나지 않은 채 외부에서 갖다 주는 최소한의 보급품에 의지해 14일을 체류하는 작업이었다.

난치병을 앓고 있는 작가가, 위치로 인해 찾는 관람객도 별로 없고 창문이나 내장재조차 없이 폐허 같은 콘크리트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둔 채 14일 간을 지낸다는 것, 그것은 육체적인 고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라는 존재와의 '극단적 대면'의 시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작가에게 그것은 자아(ego)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 시간이기보다는, 자아를 응시하는 나(I), 자신을 이러한 차가운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자기 안의 타자' 또는 '無로서의 나'라고 하는 그 무시무시한 욕망의 주체를 마주치는 극한체험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가 말한 '내적 체험'(inner experience)과 유사한 체험이 아니었을까? 삶을 극한의 불안과 공포, 죽음에 근접시킴으로써 역으로 살아있다는 감각과 '나'의 의미를 확인하는 체험, 즉 고통과 공포를 통해 쾌락을 찾는 행위 말이다.

<콘크리트 시계>에는 그러한 실존주의적 측면 말고 또 다른 면이 있었다. 그것은 '타자를 통한 자신의 발견'이란 것이다. 고립된 상황, 보통 '고독'이라는 낭만적 용어로 표현되는 그 상황은 사실 자기 자신과 평온히 대화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극한의 위기에 처한 나와 대면하는 순간'이라고 말함이 옳다. 왜냐하면 진정한 주체로서의 '나'는 절대로 스스로 자신을 구성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데카르트가 만든 '나'는 순전히 상상의 산물이었을 뿐). 따라서 고독의 시간이란, '나'의 실재성을 의심하면서 그것이 상상적 산물에 불과하리라는 불안감이 고조되는 순간이고, 바로 이 불안감으로 인해 그 상상적 '나'를 영속시키려는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는 시간이다. 고독한 자의 우울함이란 바로 모든 인간의 인격구조 속에 내재한 그러한 '근원적 상실'이 야기하는 일종의 신경증적 증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언제 출현하는가? 바로 타인이 내 시야에 출현하고 말을 거는 그 순간이다. 내가 아닌 타인들의 공간 속에서 내가 한정되고, 객체화되고, 타인의 언어를 통해 '호명'될 때, 타인이 나의 존재에 대해 기술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주체로서의 '나'가 출현하는 것이다(이것은 물론 라깡의 잘 알려진 이론이다). 따라서 김도희의 체류는 단순히 홀로 신체적 통증과 정신적 고독을 이겨낸다는 막연한 고행 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애당초 아니었다. 그러려면 굳이 그러한 행위를 미술전시장에서 할 이유는 없을 터. 그보다는 김도희는 자기를 타인에게 '전시'함으로써, 정확히 말해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언제 진정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려 한 것이다.

나의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소멸하지만 타인의 언어 속에서 끊임없이 이름을 불리우고 재출현하는 나를 목도하기.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나의 소멸과 출현'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은, 상상적 실체에서 무(無)로, 무에서 언어로, 언어에서 다시 상상적 실체로 이동하는 회로 속에서 '나'가 끊임없이 위치이동을 하는 정신분석적 경험이 된다(달리 말해 라깡이 '상상계-실재-상징계'라는 말한 세개의 영역 사이에서의 이동). 그러한 과정은 나를 결정짓고 되찾는 과정이 아니라, 단지 나에 대해 영원히 '질문'하고 좇는 과정, 소위 라깡이 '히스테리의 담론'이라고 표현한 과정이 된다.

 

 

3. 과도감각(hyperesthesia) 또는 '존재의 환유적 전락'

 

이 모든 체험은 자아, 사물, 세계에 대한 '과도감각'(hyperesthesia)의 체험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과도감각이란 외부 사물에 대해 과도하게, 폭력적으로, 내가 무너질 정도로 느끼고 감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다음과 같은 명제가 가능해진다: "세계는 과도하게 존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 안한다".

그것은 히스테리나 우울증 환자가 늘상 겪는 의식상태이기도 하다. 나와 대상을 분리시키는 장벽은 와해된다. 외부세계에 대한 감각능력이 과도하게 고조되어,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대신 사물이 나를 괴기스럽게 '응시'(gaze)하고, 내 의식을 점령하고 과도한 감각의 폭력으로 다가온다(이는 문화인류학자 로제 카이유아Roger Caillois가 말한 '신경쇠약증에서의 주체의 박탈'(depossession of self)과 같은 상황, 그리고 또 신경의학자 알프레드 비네Alfred Binet가 히스테리환자의 최면실험을 통해 발견한 상황과 같은 것이다)

과도한 자아의식은 사실 자아의 분열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자아가 아니라 외부의 수많은 감각적 사물들이 승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몸의 승리', '무의식의 승리'이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일체의 신경증은 곧 '몸의 반복적 귀환'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를 다시 자끄 라깡의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실재'(the real)의 승리이고, 실재가 자아의 인격구조를 침해하는 형국이다. 과도감각 또는 사물의 나를 향해 던지는 응시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김도희의 작업에 나타나는 정신분열증적 광기와 허망함의 분위기는 바로 그러한 '몸, 감각, 증상의 승리'이다.

여기서 참고 삼아 그녀의 과도감각이 드러난 작가노트를 참조해 보자: "내 발가락과 닿아있는 시멘트 벽은 언제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살아남는 방향으로 움직여 오던 내 몸이 점차 다른 선택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소화를 멈추었고 입맛을 잃게 했고 충동적인 심리상태로 나를 몰아갔는데 다른 방식의 에너지로 전환되고 싶은 것이리라. 욕창처럼, 썩어가는 바나나처럼 액체를 흘려 보내고 고체와 분말이 되어 이곳을 벗어나 자유를 얻어 무엇이든 되고 싶은 것이다."(2011 개인전 <죽은 나무에 물주기> 도록에서 발췌)

자신도 모르는 반복적 충동에 의해 죽음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의식상태, 감각이 과도하게 고조된 '각성'의 상태에서 사물들은 '환유'(metonymy)의 성격을 띄게 된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정상인'들의 의식이 외부세계와 자아로 구성된 하나의 '의미 있는 텍스트'(significant text, 즉 나의 의미, 위치, 가치, 정체성, 나의 역사,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의미 등, 일체의 상상적 산물들이 연결된 텍스트)라면, 신경증적 우울의 상태에서는 그 상상적으로 구축된 텍스트가 와해되고 대신 무의미하게 분리된 '감각적 단편'들로 전락, 변질한다는 것이다. 이제 모든 사물들은 분리된 조각들로서, 감각적 난폭함을 가지고 내 의식 안으로 밀려온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폭력적 단편들(과거에는 엄연한 의미 있는 사물이었을)을 '환유'라고 부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조그마한 환유적 단편은 때로는 나의 모든 의식을 대체하고 점령할 수도 있다. "내 발가락과 닿아있는 시멘트 벽은 언제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대목에서처럼, 나와 세계가 "발가락─닿아있는 시멘트 벽의 작은 면적"이라는 하나의 작은 세부(detail)로 전락하고, 그러한 세부(detail)가 확대되어 나의 시야와 의식 전부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우울증의 과도감각과 '존재의 환유적 전락'은 달리 말해 몸의 이상이 폭력적으로 또 괴기스럽게 귀환하고 폭발하는 현상이다. <콘크리트 시계>에서 김도희는 실제의 존재 그 자체를 주목하기 위해 작품이라는 물질적 대상은 포기했다. 남은 것이 있다면 미적인 가치라고는 전혀 없고 체류의 흔적에 불과한 몇몇 생활용품과 사진 몇 장일 뿐. 작가는 기본적으로 예술이 실재를 표현하는 능력과 예술의 가치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다.

 

 

4. 히스테리, 그 정치적 전복의 힘

 

비디오 작업인 <회상몽>은 여러 개의 꿈 이야기를 횡설수설 구술하는 자신의 모습들을 한 개의 화면에 오버랩시켜 보여준다. 이치에 안맞는 황당한 꿈 이야기(사실 이야기라기보다는 단어들의 무의식적 자유연상에 가까운 연쇄작용)를 하는 복수적 '김도희들'의 동시성. 이것은 의식, 의미, 자아, 이 모든 것이 분열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엄연히 눈을 뜬 채 존재하지 않는 무의식의 경험에 대해 끝없이 횡설수설하는 그 히스테리 환자 같은 모습은, 인간의 의식이 세계에 대해 인식론적으로 열려있다는 생각을 부정함은 물론, 역으로 무의식이 의식적 사유와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도 부정한다. 꿈을 기술하는 그 히스테리적 주체는 무의식과 광기를 돌연 의식의 세계 속에 기입하면서 양자의 경계를 와해시킨다. 그것은 상징계를 침범한 실재(즉 무의식, 억압된 트라우마)이다.

그것은 라깡이 '상징계'(the symbolic) 혹은 '아버지(男根)의 법의 장소'라고 정의한 사회적 소통의 공간을 찢어내며, 억압된 실재를 분출시킨다는 전복적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에 히스테리적 병증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가 있으며, 모든 히스테리 환자는 해체주의적 전복의 가장 전위적 실천자로 정의될 수 있다.

 

 

5. 쾌락의 거부(Aphanisis)?

 

비디오 영상작업인 <대칭>(symmetry)에서는 좌우로 배치된 두개의 모니터 상에 상의를 걸치지 않은 남녀가 등장한다. 그들은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자신의 양쪽 뺨을 스스로 때리기 시작한다. 이들이 자기 뺨을 치는 방식은 공간적인 대칭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왼쪽의 여자가 오른손으로 뺨을 치면, 오른쪽 남자는 왼손으로 치는 식이다.

스스로를 반복해 때리면서도 아픈 표정 없이 무덤덤하게 계속하는 남녀. 그것은 마치 자신 안에 죽어있는 그 어떤 다른 존재를 일깨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강조되어 있지는 않지만, 두 남녀의 대조와 때리는 행위를 통해 에로틱한 분위기도 어느 정도 조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우리가 아는 익숙한 기호들, 즉 남과 여라는 성적 차이의 기호, 반복적 때림이라는 폭력적 기호들이 출현하지만 모두들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한 특징들은 등장인물들의 무미건조한 표정과 기계적 행위로 인해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또는 아예 그 무의미와 차가움이 더욱 강조되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고통이나 쾌락을 느끼는 능력, 삶의 활력이 완전히 사라지진 상태, 소위 'aphanisis'(쾌락의 거부 혹은 욕망의 상실)라고 부르는 심리상태를 연상시킨다. 아파니시스는 욕망하고 즐기는 것(특히 성적으로) 자체에 대해 공포감을 갖고 거부하는 신경증적 상황을 의미한다. 그것은 '즐기는 주체' 그 자체의 소멸이다.

서두에 '화학적 가역반응'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했듯이, 겉 모습은 차가운 무반응과 무기력의 상태이지만, 사실 무의식적 주체는 소멸에 저항하기 위해 필사적 전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두 남녀의 반복되는 때리기는 자신과 타인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 모종의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해독 불가능한 메시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경증적 증상들이 전혀 실체를 알 수 없는 외상에 대한 뒤틀린 방어기제이듯이, 그것은 아무 실체가 없는 메시지, 이유 없는 때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6. 동물적 죽음(문화화된 죽음이 아닌)

 

작품 <오렌지 껍데기와 소뼈가 버려지는 곳은 같다>는 우족탕 용 뼈를 고아 우려낸 후 남은 뼈들을 모아, 오렌지 껍질과 꽃과 합해서 오브제와 사진으로 만든 작업이다. 그것은 마치 향기로운 꽃으로 장식된 시신이 안치된 관을 연상시킨다. 이는 한편으로는 죽음을 '처리'하고 '배제'하는 인간의 문화적 관습을 비평적으로 패러디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죽음이 지니는 전복적 힘과 쾌락적 측면을 드러내는 듯이 보인다.

조문객의 찬양적 담론과 화환으로 가득 찬 장례식에서 상징화되고 반복적으로 훈육되는 '죽음의 지식'은 실상은, '인간화된 죽음', '문화적으로 상징으로 대체 된 죽음', 즉 '죽음의 문화화'에 불과하다. 장례식은 단지 '죽음의 기념비'를 설립하는 절차일 뿐이다. 일종의 '상징의 정치행위'로서의 장례식은 공포와 무의미로서의 진정한 죽음을 최종적으로 인간의 세계에서 분리시키고, 존재하지 않는 악의 영역으로 타자화시키는 '무의식적 억압의 절차'인 것이다.

이 작품은 동물뼈와 쓰레기 같은 오브제들을 쌓아놓음으로써 죽음을 무의미한, 심지어 우스꽝스럽거나 비천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상징적 의미가 전혀 없는 '동물적 죽음', 또는 죽음의 '동물화'(무의미화)이다. 나아가 냄새나는 소뼈를 향기로운 오렌지 껍데기와 꽃으로 치장함으로써, 죽음을 미화하고 죽음의 쾌락에 대한 환상을 표현한다.

 

 

7. 존재의 흔적, 또는 허망함의 알레고리

 

작품 <신치로이드 60>(2003)에서 그랬듯이 김도희는 종종 어떤 행위와 과정의 흔적 만을 전시하곤 한다. 이번에 전시한 <도로 위의 직선운동>은 길 위에 대형 종이를 깔아 놓고 그 위에 자동차나 행인이 일정시간 밟고 지나가게 한 후, 지저분한 흔적이 남은 종이를 전시한 것이다.

모든 '흔적'은 필연적으로 어떤 허망함과 모호함의 정서를 내포한다. <신치로이드 60>과 <도로 위의 직선운동>의 경우, 사실 김도희가 그 흔적과 관련하여 진행한 모든 사건들은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진 것이고, 그 흔적만 가지고서는 그 누구도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없다. '사건의 진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직 작가 자신만이 그 모든 것을 겪었고, 그 흔적의 주관적 의미와 생성경로를 알고 있을 뿐이다.

전통적 매체인 회화나 조각이 보통 예술가의 심적인 표상에 일치하는 등가물로 읽히게 되는 것과는 달리, 흔적은 실제 사건발생의 과정에서 남겨진 하나의 부분적 지표(철학자 퍼어스Peirce가 'index'라고 부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의미의 표출'이 아니라 '의미의 상실'이라는 방식으로 맨 처음 출현하기 때문에, 수수께끼 같고 '알레고리'적인 기호로 읽히게 된다. 따라서 관객은 그 흔적이 형성되게 된 과거를 알아 맞추어야 할 수동적 '독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그 흔적이 수반하는 실제적 사건 속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실재의 무게 자체를 짊어지는 행위이고 이것이 알레고리적 읽기가 실재와 밀접한 이유를 갖게 되는 이유이다.

흔적은 '이후의 사건'(post event)으로 새로이 개시된다. 이러한 '사후의 창조적 읽기'가 바로 알레고리이다(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유사한 표현으로 'Punctum'이나 'Sens obtus'(무딘 의미) 같은 용어들을 추가한 바 있다). 모든 알레고리는 기본적으로 '이미 사라져 없어진 것' 즉 '허망함'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포스트모던 알레고리 이론가들은 고대 유적이 자아내는 '허망함'의 느낌이 곧 전형적인 알레고리의 사례라고 말했다. 우리는 풍화되고 허물어져 가는 기념비 앞에서 찬란한 제국의 영광보다는, 역사적 흥망성쇠의 덧없음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되뇌이게 된다.

<도로 위의 직선운동>에서 보도블럭과 발자국들의 무수한 흔적들은 '흘러가 버린 과거의 현재적 지속', 즉 '시간 속에서의 존재의 덧없음'을 경험하게 해준다. 이 밖에도 김도희는 불에 타다 남은 종이조각배를 다시 펴서 액자에 넣거나 파리채로 때려 피범벅이 된 모기를 그대로 액자에 넣어 전시했다. 이보다 더 선명한 허망함의 알레고리가 어디 있겠는가?

흔적은 바로 그 허망함과 죽음의 감각 속에서 역설적으로 관람주체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재현적 회화가 상상적으로 현재를 되살리는 것이라면(모네의 해돋이는 언제 보아도 해돋이이다), 흔적은 관객이 서 있는 바로 그 곳에 마치 유적이 그랬던 것처럼 죽음과 상실을 환기시킴으로써 관객을 실제의 시간 속에 재위치 시킨다.

 

 

8. 맺는 말:

 

김도희. 매우 젊은 작가이고 작업은 거칠고 투박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섬짓한 날이 서 있다. 아직 많은 작품들이 작가의 입장에서 보아도 대단한 기대감 없이, 미술계에 인상을 주고 싶다는 욕망도 없이, 그대로 뿜어내듯 튀어 나온다. 미학이 무엇인지, 예술가가 어때야 하는지, 미술계는 무엇인지, 그딴 문제는 아직 하찮을 장식일 뿐이다.

한가지는 확실한 점은, 기획과 예측에 너무 골몰하는 요즘 젊은 작가들과는 달리 그녀의 작업은 전혀 예측 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그녀는 '증상의 작가'이다. 증상, 이것이 바로 낭만주의시대에 '재능'이라고 부르던 바로 그것이고, 정신분석과 기호학,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재능을 부르는 새로운 용어이다. 그녀의 향후 작업은 그녀의 증상의 예상치 못한 분출과 궤를 같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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