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것을 뚫고 흐르게 하는 분열의 방식
젊은 모색 2014 전 (2014. 12. 16 ~ 2015. 3. 29, 국립현대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30년 넘은 전통을 가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전은 각 시기에 젊은 작가들이 처한 상황을 반영해 왔다. 시대나 세대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전시의 목적은 아니더라도, 재능 있는 개인의 역량이 총 결집된 예술 작품에는 그것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18회째 선정된 8명의 젊은 작가들의 많은 작품들이 파편적으로 다가온다.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 파편들은 세포, 또는 작은 감옥처럼 보이며, 줄줄이 연결되어 일련의 미로를 만든다. 절편화 된 이미지가 실어 나르는 서사는 뚝뚝 끊겨있다. 그들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말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침묵하곤 한다. 수다와 침묵은 모두 의미와 거리를 둔다. 의미보다는 무의미가,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이, 기억 보다는 망각이 우세다. 그러나 가벼움과 망각이 경쾌함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거기에 경쾌함이 있다면, 다소간 히스테릭하다.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단편들을 종합해줄 메타적 심급은 발견하기 힘들다.
이러한 파편화는 경계의 와해와도 관련된다. 파편들은 주체와 객체, 그리고 그 사이의 경계가 해체되어 쏟아져 나온 것들이다. 경계의 와해는 죽음의 기호이자 열락의 기호이다. 파편들의 편재성 속에서 각 작가를 구분 짓는 칸막이만이 분명하다. 칸막이 속의 또 다른 칸막이들은 서로 소통되거나 연결되지 않는다. 영상, 설치 등 다양한 형식으로 이합 집산하는 단편들은 그자체가 무의식과 꿈의 이미지들이다. 때로는 조울증같은 광기도 발견된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프루스트가 꿈의 모델을 훌륭하게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부분들이 어떤 원리나 지도적 이념아래서 하나의 전체로 통합되는 모델이 아니라, 칸막이 친 듯 격리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유기적인 로고스와 비유기적인 파토스의 구별로 이어진다. 파토스의 세계는 격리된 부분들로 이루어진 정신 분열증적 우주로서, 횡단적 탈주 선들을 따라 움직이는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무정부적인 마주 침들과 폭력적인 우연들의 세계이다.
들뢰즈에게 꿈은 순수 사유의 이미지 모델이다. 꿈은 전제된 사유의 공리뿐 아니라, 전제된 주제조차 없다는 점에서 순수하다는 것인데, 이 순수사유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조각난 파편들 같은 통일성 없는 자아들과 전체성 없는 대상들을 선택한다. 파편들의 세계는 우연적이고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꿈과 무의식, 그리고 광기의 세계이다. 작품들에는 이미지와 서사가 나오지만 잘게 잘려져 있고 단면들 간의 간극은 크다. 이 브리콜라주의 세계에서 ‘단편들을 또 다른 단편화 속에 들어갈 뿐’(레비 스트로스)이다. 분리된 부분을 더욱 잘게 토막을 치는 감수성에서 전체에 대한 공격 본능과 카타르시스가 발견된다. 유기적 전체란 낭만주의적 환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 이제는 불가능한 기획이다. 총체냐 파편이냐의 문제는 미학의 오랜 논쟁거리--가령 루카치 vs 브레히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고전주의나 사실주의에 특유한 총체성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현대예술가는 파편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각각의 파편들은 그 사이의 간극들을 상상력으로 채워가며 어떤 의미와 재미를 만들어내는 감상자들의 기대를 따돌리고 자기만의 자율성을 구가한다. 각 단편은 생경하게 박동 치며 순간순간 강렬할 뿐, 그 이유와 목적, 시점과 종점이 불확실하다. 작가 8명의 개성이란 그가 선택한 파편이 무엇이고 어떻게 배치했는가의 차이에 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된다는 신학적 가설로부터 자유로운 현대예술은 배치, 즉 맥락을 중시한다. 배치방식에 따라 파편들의 밀도와 속도가 정해진다. 어떤 것은 빠르게 장면 전환을 하며, 어떤 것은 느릿하지만 왜 그렇게 잘려져 있고 그런 식으로 마주하는지 불확실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련을 맺지 못하는 파편성은 자연과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현대미술의 기본 특징이긴 했지만, 여러 명이 참여한 하나의 전시에서 받은 느낌이 이렇게 일관되기도 드물다. 하나의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은 그룹 전으로서는 성공적임을 말한다. 그것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식의 전시에서 받을 수 있는 잡다한 인상과도 다르다.
한편으로 파편성이란 자신에게 쇄도하는 자극들을 나름의 방식대로 걸러내 조직화할 수 없는 무능을 예시하기도 한다. 전능한 소비자 되기를 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입력과 출력 사이에 드리워진 불균형은 그러한 소화불량의 가능성을 높인다. 젊은이들은 한국 사회가 가하는 압박에 완전히 부스러져 버린 것일까.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시키는 노력을 해도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피드백이 없는 이러한 구조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길은 차라리 부스러기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배적 구조의 편집증에 대응하는 분열증의 전략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지배적 구조가 요구하는 쓸모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무)의식적 충동은 거셌을 것이라고 본다. 기성사회의 요구에 맞춰진 그 수많은 노력과 노고들이 거듭해서 무력화되는 현재의 구조 속에서, 그들의 필요와 쓸모에 부응할 뿐인 정체성을 애써 구조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에 진입하길 원하는 젊은이들의 저항은 늘 있어왔지만, 요즘은 이전세대가 가졌을 법한 저항의식은 형태를 달리하는 듯하다. 거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초월이란 있을 수 없기에 그들은 대세와 함께 물결치며 그 속에서 상호작용한다. 지배적 구조는 매순간 스스로의 무용성을 확인하며 내파되고 있다. 지배적 코드가 제시하는 목적을 따라가기 힘들다가 아니라, 따라가 봤자 소용없다는 의식의 팽배는 저항의 또 다른 단계를 요구한다. 지배적 구조에 굳이 맞설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잡히지 않으려한다. 분열은 도피, 또는 탈주의 한 방식이고, 분열된 것들의 재조합은 변형을 야기한다. 차이와 반복을 통한 작은 변형 뿐 아니라, 괴물같은 과격한 조합도 가능하다. 젊은 작가들은 산산이 쪼개져 있다가 순간적으로 실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유력한 맥락 중의 하나는 작업이나 전시라고 할 수 있겠다. 표현의 기회를 가진 자에겐 나름의 의무가 있다. 특히 예술 하는 젊은이들은 한국 젊은이들의 아픈 손가락에 해당된다.
가파르게 성장해온 한국사회가 외향적으로만 번지르르한 이상한 지옥을 만들어왔다는 점, 그리고 겉과 속이 다른 이 위선적인 사회가 실은 끊임없이 정신 분열을 종용해왔다는 점은 대응의 한 방식을 예견케 한다. 현실과 평행하게 존재하는 예술의 세계에서 분열은 더 가속되고 그렇게 생산된 파편들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되는 것이다. 젊음이라는 가장 값진 자원을 가진 이들을 절망케 하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한계 속에서 작가들은 젊은 세대의 소리 없는 비명을 조용히 증폭시킨다. 전시장에 처음 들어서서 보게 되는 김도희의 작품은 불안한 주체의 경계를 보여준다. 불안한 경계 사이로 오물이 새어나오고 주체 내부에 이질적인 타자가 꿈틀거린다. 주체가 주체로서 성립되기 위해 오물을 밖으로 던져져야 하고, 동일성과 그 동일성을 유지해주는 환경은 적절하게 조직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도희의 작품에는 그 모든 상징적 세계의 요구를 배반하는 실재의 흐름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지린내를 풍기는 거대한 오줌얼룩들은 실재의 비루함과 강력함을 동시에 말한다.
영상 작품은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미지의 실체를 예시하는데, 마치 모체 속의 태아처럼 동일자 속의 타자이다. 그것은 전능한 모성의 신화에 호소하지 않고, 앙포르멜 회화를 닮은 거대한 오줌 얼룩 천처럼 기괴하다. 주체의 일부가 사물처럼 쇄도하는 극단적 소외는 작가로 하여금 승화보다는 터트리기를 선택하게 한다. 그 다음 칸의 김하영의 작품은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김도희의 전시장과 대조되게 밝고 화사하다.
김도희의 작품이 우울증의 세계라면, 투명하고 밝게 빛나는 김하영의 작품은 조광증의 세계이다. 작품들은 절단된 신체들이 이합집산하는 장이다. 산뜻한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으로 그려진 조각난 신체들은 ‘흥겨운 몸canne/vale’ 즉 카니발을 구체화한다. 이러한 단편들은 위계적인 질서를 해체하는 축제적인 몸짓이다. 부분과 전체의 조화에 기초한 유기체에 각인된 우울한 독단, 그에 저항하는 반항의 몸짓은 유쾌하다. 구조가 유기체를 불구로 만들기 이전에 스스로 잘라내 거칠 것 없는 욕망의 흐름에 합류시킨다.
학부 때 영화를 전공한 김웅용의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가 애초에 사진이라는 파편들이 연결(편집)된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작품 [텔레파시]는 실종자에 대한 두 증언을 바탕으로 한 두 개의 영상을 재편집한 작품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추리를 촉구하는 단편들이 이어지는 방식이다. 마주보는 두 화면에서 한 화면은 아예 부분들에게만 조명이 되어 있어 최종적인 모자이크는 각자 완성하는 과제로 남겨둔다. 윤향로의 작품은 같은 크기의 패널에 여러 이미지를 담아서 기계적으로 배열한다. 영상작품에서는 기존의 만화나 영화 등 작가가 정보의 바다에서 선택한 여러 영상들이 짜깁기되어 하나의 흐름으로 흘러간다. 오려낸 글자로 쓴 문장처럼 개인의 필적은 사라진다. 텍스트로 된, 또는 상호 텍스트적 세계에서 의미의 원천으로 간주된 저자 역시 사라진다. 파편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것은 동일한 프레임들로 된 공간적 형식의 통일성, 그리고 하나의 영상물에 담겨진 시간적 연결망이다.
하얀 벽면에 하얀 글씨로 써놓은 문장들, 테이블 위에 놓여 진 검은 책들은 읽고 이해하는 것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매순간 우리 앞에 명멸하는 스펙터클처럼 흩어져 있는 채 끝없이 흘러가는 정보의 덩어리로 보여 진다. 노상호가 고풍스럽게 연출한 수레나 박스에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조합해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박스 안에 들어가서 희미한 전등 빛에 의지하여 보게 되는 이미지는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다. 한 벽면은 분절화 된 이미지로 다른 벽면은 연속된 이미지지만 각각은 이야기의 촉발자이자 구성요소일 뿐, 그것을 통일적으로 이끌어가는 원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시간성을 타야하는 서사를 공간화시킴으로서 서사는 해체되고, 관객의 동선이나 시선의해 다시 짜여 질 것이다. 오만의 작품에는 학부 때 음악을 했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관객이 영상을 통해 들을 수 있는 피아노 연주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있기에 음악에 몸을 실을 수 없으며, 대신에 서서히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화면을 통해 또 다른 리듬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은 어느 지점에서 공회전하고 공간은 신축적이다. 그래서 변화가 거의 없는 장면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을 주지 않는다. 관객은 피아노 연주를 완벽한 통제 하에 두려는 연주자의 불안한 주시를 마주한다. 왜 이 순간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장면들은 지금 여기를 특권화 한다. 단정한 복장을 한 여성이 쓰러진 의자들 위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는 오만의 또 다른 영상은 권력이 관철되는 일상적 동작의 부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조송의 전시장은 여러 크기와 형식의 액자에 담긴 초상화로 가득하다. 초상화라는 형식을 갖춘 그림을 하나하나 보여 주기보다는 설치형식으로 배치하면서 액자를 무엇을 내다볼 수 있는 하나의 틀이라기보다는 사물로 만든다. 틀은 투명하지만 사물은 불투명하다. 같은 크기의 액자로 다닥다닥 붙여놓은 작품들 한켠에 중구난방으로 걸어놓은 작품들은 그 안의 비인간적 도상들과 더불어 초상이라는 형식 자체를 탈 중심화 한다. 화면 안의 것들은 어두침침하고 초상화가 될 만한 적절한 대상들이 아니다.
절단된 신체들이 널 부러진 살풍경과 인간의 퇴행적 모습을 암시하는 듯한 원숭이, 그리고 두 가지 이질적인 동물이 만나 만들어진 괴물에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라고 붙이 제목은 만물의 척도였던 인간은 계몽 이전의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 관객이 전시장을 빠져 나와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권용주의 작품은 건축자재나 공사폐기물, 누추한 살림살이 등을 이리저리 쌓아서 전시장 중앙 계단을 흐르는 폭포로 만든다. 삶으로부터 나온 부산물로 재구성된 또 다른 인공적 환경은 우리 삶을 이루는 구조들이 얼마나 얼기설기 엮여 있는 취약한 것인지 암시한다. 작가는 여기에 [생존의 전략]이라는 역설적 제목을 붙였다. 생존의 전략이 관철된 구조는 겨우겨우 이어나간 파편들에 불과하지만, 시원스레 쏟아지는 욕망의 물줄기를 통과시킨다. 잘 맞물려서 돌아가거나 꽉 짜여 진 필연적 우주가 아닌 우연적 요소들이 횡행하는 장은 정신분열증적이다. 세계는 자연은 물론 몸과 무의식까지 언어로 환원되어 가는데, 그 언어자체가 분열적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지시대상으로부터 분리된 기호가 다시 기표와 기의로 연속 분열되는 과정을 거쳤고, 현대는 기표들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정신분열증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라고도 말해진다. 가령 한 인물 속에 공존하는 생산자/소비자로서의 입장에는 분열의 계기가 상존한다. 인간, 역사, 언어를 차례로 해체해온 현대 예술 역시 정신분열증적이다. 예술은 하나의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 외디푸스]에서, 정신분열자의 도정을 묘사한다. 그들은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지만 생산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작동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라는 문제가 몰락해 갈 때 욕망이 등장한다. 정신분열자에게는 인간도 자연도 없으며, 오로지 이것이 저것을, 혹은 저것이 이것을 생산하고 그리하여 연결시키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외부와 내부는 여기서 이제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정신분열자에게는 원리들이 없다.
그가 어떤 것이라면 이것은 오직 그가 다른 것임 으로서이다. 자아들이 가두어 놓고 억제하고 있는 인물 이전의 단일체들을 해방시키는 것, 자기 동일의 조건들에 미치지 못하는 바로 그곳에서 분열과 절단들을 더 멀리 더 세밀하게 확립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단편성은 그들이 특히 언어적 세계 속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 구조주의적 사고에서 언어는 중심이 있는 구조로 간주되지 않는다. 데리다에 의하면, 중심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기원, 목적, 혹은 정점(定點)으로 기능하여, 구조를 한 전체로서 균형 잡고 조직하며, 구조의 놀이를 제한한다. 중심이 있는 구조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정신분열증 환자가 자본주의 아래서의 생존을 위한 이상적 모델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구조는 어떤 고정된 중심, 가령 정체성, 의식, 이성을 둘러싸고 조직되어 있지 않는다.
젊은 작가들이 구사하는 언어적 기호는 자의적으로 보이지만, 언어란 원래 자의적이다. 언어란 정체성을 비롯하여 상징적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지만 그 언어 자체가 탈 중심화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기표들 사이의 틈새에서 징후적으로 드러나는 광기나 우연성에서 누군가는 탈주와 해방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 전시장은 기존의 영토로부터 탈주하고 그들 나름의 영토를 재구축하기 위한 기표들이 출몰하고 유목하는 장이다. 욕망을 실어 나르는 기표는 항상 유목하며 이동한다. [앙티 외디푸스]에 의하면, 욕망을 생산하는 것이 기호의 유일한 사명이라고 말한다. 욕망이란 인물들이나 사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편력하는 환경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오직 욕망만이 목표 없이 존재하면서 살아있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 언어에는 뭐라 결정지을 수 없는 욕망이 있다. 욕망에 결여되고 있는 것은 주체이다. 혹은 욕망은 고정된 주체를 결여하고 있다. 고정된 주체는 억압을 통해서만 있다.
기성사회는 오직 하나만을 보고 가라고 요구해왔지만 현실은 하나가 아니다. 음으로 양으로 젊은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양한 역할들이다. 젊은이들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상충될 수도 있는 수많은 스펙들로 산산이 분열되어 있다. 젊은 작가는 이 분열을 가속화시킨다. 아직 성장을 마치지 않은 파릇한 젊은 작가들에게 분열이 없다면 성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생장에서 확인된다. 예술적 기표는 현실 보다는 가볍기에 가속은 용이하다. 가속은 가벼운 놀이를 통해서, 때로는 진지한 실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언제나 한술 더 뜨기 전략을 통해 고착된 현실에 대응해왔던 예술의 고전적 전략이기도 하다. 작가는 주체와 객체를 단편들로 해체하고 다시 조합한다. 현실의 단편들은 이접(離接)을 통해 막힘없는 흐름으로 연결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들뢰즈)이다. 그들은 기존의 모델을 재현하지 않고 분열하면서 생성(schismogenesis)하는 것이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 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