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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실재의 사이’, 김도희의 제1회 개인전을 보고

 

1. 소설로 읽는 철학책인 '소피의 세계'에서 저자는 편지의 형식을 빌어  "슬픈 사실은 우리가 자라면서 중력의 법칙에만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 세계 자체에 길들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한다. 당대를 지배하는 통념과 함께 사람들은 누구나 주관적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따라서  한 개의  사과도 과거의 기억과 함께 본다. 사람마다 경험과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  서양에서는 '참실재'와 '언어'는 서로 별개의 세계이며 언어의 두가지 요소로서  '기표'와  '기의'를 나누게 됨에 따라 기표와 기의가 서로 일치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펼쳐지며,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된다고 말했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진작부터 약속된 기호체계 속에서 형성되는 익숙한 세상을 더없이 낯설게 보는 이들이다. 김도희도 그러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2.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면 제목이 <Self bomb. 2004>인 석 장의 사진이 붙어 있다. 종이 표면에 한글 숫자가 적혀 있는 띠 종이로 머리 부위를 미라처럼 감은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은 작가가 대학원 재학 시절에 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종이에다 숫자 쓰는 일을 일정한 시간동안 지속적으로 행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즉 숫자쓰기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투적인 작업을 거부하기 위한, 즉  작업아닌 작업이다. 그런데도 담당 교수가 이런 동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왜 작품을 안 하느냐고 해서 사진으로 촬영, 인화한 결과물(?)을 제시하자 그때서야‘작품’으로 인정하더라는 것이다. 그 담당교수는‘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한‘그럴듯한 이미지’만을 본 것이다. 이처럼 이 사진들은 대학 현장에서 과연 어떠한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작품으로, 역설적으로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전시장의 중간쯤에는 노란 테잎으로 칭칭 감아놓은 캔버스canvas가 벽에 걸리지도 않고, 벽에 비스듬히 놓여있다. 바로 <Nothing. 2004>이란 작품으로 이 작업은 노란 박스포장용 테이프가 뒤집어 진 상태로 감겨있었고, 표면에는 기다란 머리카락들과 먼지, 곤충 등이 엉겨 붙어있었다.이 작업을 하게 된 계기도 작가는‘캔버스 회화’를 거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없이 상투적으로 행해지는 교육 현장의 병폐를 목격하면서, 그러한 현실을 통렬하게 조소한 작업인 셈이다.그런데 작가는 이 작업이 원작이 아니라고 했다. 원래 다른 원작이 있었는데 청소하는 사람이 쓰레기인줄 알고 버리는 바람에 없어져서 새로 재현했다고 한다.

  전시장 가운데는 <신치로이드 60, 2003>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장지 한 장이 구겨진 채 벽에 붙어 있는 작품이다. 제명의 ‘신치로이드’란 작가가 갑상선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10살 때부터 하루 두 알씩 복용해온 약으로, 작가는 이 작업을 하기 위해 한 달간 이 약의 복용을 중지한 채 이 장지를 깔거나 덮고 잤다고 한다.(*‘신치로이드 60’이란 제목은 바로 한 달간 투약을 중단한 것을 뜻함.)나는 작가에게 그 당시의 신체적 증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작가는 “몸은 날이 갈수록 무기력해지는데 심리적으로는 더 예민해지더라구요.”라고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수사(修辭)’로 이 흔적에 대해 서술할 수 있겠는가. 작가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이 한 장의 장지에 흔적으로 남겼지만, 관객은 다만 그 흔적으로 그러한 경험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흔적은 그야말로 어떤 흔적일 뿐 작가 자신의 당시의 고통과 심리적 상태를 온전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는 관객의 감수성의 정도에 따라 제각기 다른 상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면서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임을 자각할 수도 있다. 가령 우울증이란 질병도 ‘세르토닌’이란 신경전달물질의 부족이 유발하는 무서운 질병인데, 그 양의 부족하고 많음이란 현미경으로나 확인할 수 있는 미세한 차원의 문제이다. 우리는 실로 미묘하고도 섬세한 유전적 기제를 갖고 있는 신체를 지닌 존재인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이러한 미세한 물질의 차이로 마침내 생과 사가 엇갈리는 존재이다.물론 이런 식의 작업은 아름다운 볼거리를 기대하고 온 관객에게는 당연히‘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바로 이 ‘거부감’을 잠시 접고 자신이 대면한 ‘타인’의 삶의 흔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어느 순간 이 작업의 진정성을 실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새삼 내가 어떠한 미세한 물질의 흐름으로 지속되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시각에서도 <신치로이드 60>이란 작품은 개인의 문제, 혹 개인의 사적인 차원을 떠나서 그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

 

< 손톱산수, 2004>는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를 사포 위에 작가의 손톱으로 다시 그린 것이다. 즉 손톱산수는 현대의 준법(皴法)이다. 겸재의 준법은 단순히 실재하는 것을 모사하기 위한 양식적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겸재의 ‘정신성’과 우리의 산천이 만나 성립한 것이다. 그러므로 겸재의 준법을 현재에 와서 반복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김도희의 <손톱산수>는 겸재의 ‘준법’을 따라하거나 접근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즉, 작가 스스로 몸의 일부를 활용하여 표현한 것이 ‘준법’일 뿐이다. 즉 작가는 비록 자신의 신체의 일부인 손톱을 갈아 금강산을 그렸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신체 일부를 마멸하는 행위의 흔적으로 하나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바로 이러한 점이 전통과 ‘현대미술’이 만나는 하나의 접점일 수 있다고 보며, 또 다른 하나의 관점이자 대안의 제시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의 어법들은 원점에서 출발하는 바로 그 투명함과 명쾌함으로 작업의 이면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하며, 그 이면에서 작가가 ‘의도’하는 지점과 마주 대할 수 있게 한다. 비록 처음에는 그 마주침이 낯설지만 우리는 바로 그 마주침의 순간 늘 대하는 상투적인 것들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두개의 비디오 작업을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미친나무, 2006>라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실제로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찍은 것이 아니라 나무가 흔들리는 것처럼 연출한 것이다. 즉 <미친나무>는 ‘착시’현상을 이용한 작업으로 우리의 지각을 유발시키는 영상작업이다. 그러므로 이는 시각적 이미지의 네러티브narrative가 아니다.또한 <미친나무>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동영상’이미지, 즉 기계적 메커니즘에 의한 정교한 색점도 아니다. 다만 김도희의 <미친나무>는 보는 것과 그 실상이 다를 수 있는 착시 현상을 통해 바람에 대한 우리의 원초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흔히 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고 생각한다. 과연 나무는 바람에 의해 떨림을 당한 것인가. 아니면 나무는 바람 속에서 주체적으로 떤 것인가?거대한 대지에 우뚝 선 나무 한 그루가 불어오는 바람에 큰 소리를 내며  그 커다란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고대인들에게 공포와 외경의 대상이었다. 사실 고대인에게 바람은 신의 소리이자 숨결이었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도 마찬가지다. 단군신화에 나오는‘풍백(風伯)’은 곧 ‘바람신’을 의미한다.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우리 신라인의 고유한 신앙체계로서 바람의 흐름, 즉 ‘풍류(風流)’을 말하고 있다. 신라의 금관은 자작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거기에 달려 있는 얇은 금판은 자작나무의 잎을 형상화한 것이다. 언젠가 박물관 관람객의 발자국에도 떨리는 금관의 미세한 떨림을 통해 나는 우리 고대인들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고대인에게 바람은 ‘신끼’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인에게 나무의 떨림은 바람이 불어와서 수동적으로 흔들리는 대상이 아니었다.나는 이러한 고대인의 바람에 대한 느낌이 오늘날 우리가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바람, 즉 기압과 기압의 차이에 의한 공기의 흐름보다 우리 몸이 지각하는 바람의 실제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왔는데, 예기치 않게도 김도희의 <미친나무>를 통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바람이 분다고 느끼는 우리의 지각은 바람이 타자의 몸을 빌어 ‘실체’를 가지게 됨을 안다. 동시에 나무는 보이지 않은 바람의 공성(空性)을 입증한다. 이로써 ‘색(色)’의 세계와‘공(空)’의 세계는 둘이면서도 둘이 아닌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 타자의 몸을 빌리지 않은 실체를 과연 무엇으로 지각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우리의 지각에 대해 한 차원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다.< 미친 나무>의 오른편에는 또 다른 작업인 <월광月狂, 2006>이 있다. 이 ‘달’을 이미지로 해서 작업한 것은 <미친 나무>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혀 예기치 못한 감수성을 유발시킨다. <미친 나무>가 다른 각도에서 이루어진 이미지를 프레임의 시간단위 위에 반복적으로 배치시킴으로서 일상적 시각의 혼란을 유도하고 있다면, <월광月狂>은 얼핏 보면 달을 촬영한 사진을 실시간으로 프로젝터로 비춰서 보여주는 듯하다.즉 <월광>은 실제 달의 이미지만을 빌어 그 움직임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재조합하여 움직이게 하는, 프레임 상에 놓여있는 가상의 ‘달’이다.  작가는 “지구에서도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달의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지구와 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았다”고 작업 계기를 밝혔다. 그리고 또한 “언젠가 전기 불빛을 보면서 달빛으로 착각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나는 그의 달을 보면서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그러나 우리 몸은 알고 있을 ‘달의 원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동양의 고대인들에게 달빛은 음의 기운의 상징이었다. 도가에서도 달은 ‘어떤 음적(feminine) 상징태의 총화’였다. 나는 이러한 측면에서 김도희의 <월광>에서 페미니즘적 요소 이전의 원초적 ‘여성성’을 발견하게 된다.이런 맥락에서 특히 이번 전시회 작품 중 이러한 여성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작업은 <Untitled 2003>이란 영상 작업이다. 이 작품은 얼핏 보면 변기 속에 노란 색의 이물질이 물과 함께 변기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보였다 하는 장면의 반복인데, 이 노란 색의 물질인 달걀 노른자는 사람으로 치면 ‘난자’이다. 난자는 한 달에 한 번 배란되지만 수정되지 않으면 자신의 피와 함께 배설되어 버린다. 생명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물질이 수정되지 않음으로 몸에서 떨어져 나가버리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실 <Untitled 2003>이란 작품은 여성들에게 더욱 공감이 될 수 있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김도희의 작업은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비롯된 사적인 체험에서 출발했지만, 각각의 작업들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은 그저 하나의 동기임을 확인하는 것일 뿐 더 이상 사적인 일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미친나무>와 <월광>의 경우 우리의 전통적 자연관이자 세계관으로 말한다면  ‘바람과 달의 길’, 즉 ‘風月道’이다.  나는 그의 <미친 나무>를 보며 신끼 어린 여인이 산발하고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김도희의 이번 감수성 예민한 일부 작업들-사실은 현실 비판적인 동기가 강한 작업들임에도- 이 마치 무당의 신끼처럼 우리의 원형 무의식이 저절로 표출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러한 감수성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으며, 이 땅에서 수 천 년 이어 온 조선 여인의 어떤 내재적 힘까지 느낄 수 있었다.

 

2.김도희의 이번 개인전 출품작들은 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으로 보면 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도희의 작업은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 너머 삶의 진정성을 향하고 있다. 나는 김도희 작업의 이러한 측면이 예술가로서 그의 ‘실천’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치체계나 통념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한 태도이다.  '현대미술’이 다른 여타의 상업적 시각문화와 구분되는 중요한 점 중 하나는 바로 관객과 작가의 정신이 만나는 접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김도희의 작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미술’이 시각적인 매체를 이용한 것이 주된 사실이더라도 미술작업은 관객의 상투적 관념 등의 통념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동기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념에 비추어 생경하게 보일 수 있으며, 충돌할 수도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미술은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영역일 수 있는 것이다.사실 우리는 교육을 받거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인식체계와 가치체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옳다고 배우고 인식해 온 세계 속의 통념과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의 실체를 접했을 때 그것이 처음에는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보고 즐기려 하는 한 결코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것은 좋았던 기억만도 아니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그 이전의 ‘나’를 자각하는 순간, 동시에 정작 무엇이 나를 세계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도희의 이번 개인전 작품들은 통념으로서의 미술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는 까닭과, 그로부터 우리의 진정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2006년 8월 13일, 광명에서                                                 

    도 병 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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