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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윤리학 –김도희의 몸 작업들에 대한 단상

1. 육기(肉氣), 감각의 직접성

  김도희의 작업은 대부분 자기 몸을 익숙한 조건에서 이탈시켜 새로운 조건 하에 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작가에 따르면 그 새로운 조건은 “감각의 불씨를 최대한 증폭시킨” 상태에 해당한다. “최대한”이라는 표현을 쓴데서 드러나듯 이 작가는 몸을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극단적 조건에 둘 때가 많다. 그 극단적 조건 하에서 몸은 혼란과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초기 작업인 <신치로이드 60>(2003)에서 이 작가는 몸의 고통을 완화시켜줄 약(신치로이드)을 한 달 간 끊고 이불 크기의 장지 한 장을 깔고 덮으며 생활했다. 그 장지는 한 달 간 그녀 몸의 궤적과 고통을 생생하게 간직한 도큐멘트가 됐다. 그런가하면 2011년의 <콘크리트 시계>에서 김도희는 냉랭한 콘크리트 전시 공간에 자신의 (아픈)몸을 가둔 채 14일을 지냈다. 거기서 그녀는 말 그대로 “사유할 틈도 없이 몰아치는” 변화들에 몸을 내맡기고 “무수한 낯선 것들에 온 몸으로 신경질을 내면서 적응”해야 했다.

  인간의 몸은 익숙한 조건에서 벗어날 때, 즉 “일상적으로 쓰던 파장과 에너지를 쓸 수 없는 환경”에 놓일 때 좀 더 예민해지는 경향이 있다. 갑자기 어디선가 지독하고 고약한 냄새나 소리가 날 때 몸의 반응을 떠올려보자.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때, 즉 지독하고 고약한 냄새나 소리에 반응할 때, 몸은 세계를 좀 더 생생하게, 또는 실감나게 경험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작가는 여러 인터뷰에서 추상적인 개념이나 상상보다 “실제 나의 몸과 마음을 확 사로잡고 움직이는 것”이 자기 작업을 추동하는 계기라고 언급했다. “내 몸이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정말 중요하다”는 발언도 있다. 붓이 아니라 손톱으로 큼지막한 사포에 그린 <손톱산수>(2004)도 그렇지만, 소위 불능의 언어에 대한 적대감에서 “개념의 완전 연소”를 시도한 <Coding Conversation>(2009)을 떠올려보면 김도희의 작업 일반에는 확실히 개념의 매개를 거부하고 감각의 직접성(immediacy)에 육박하려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이런 태도는 특히 개념의 매개 작용에 취약한 시각보다는 촉각이나 후각, 청각적인 자극들에 먼저 호소하는 작업들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전시장 바닥에서 악취를 풍기며 생생하게 썩어가는 반짝이는 모유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만월의 환영>(2012), 아이의 오줌냄새로 진동하는 <야뇨증Bed Wetting>(2014) 같은 작업들에서 그녀는 시각적 관조에 맞춰진 갤러리 전시장의 쾌적한 리듬을 깨트리며 관객들에게 자신의 살아있는 몸을 수행할(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이 작가는 “진짜로 살아있는 것은 지린내처럼 강렬한 게 아닐까?”라고 물었다. 그 강렬한 것을 일러 이 작가는 ‘육기(肉氣)’라 했다.

 

2. 감각의 한계, 마음의 역치(閾値)

  그런데 인간의 몸은 아무리 강한 자극들에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적응한다. 즉 몸틀(un schéma corporel)은 상황에 맞춰 변하기 마련이고 몸은 다시 새롭게 구조화된다. 심리학자들이 역치(threshold value)라 부르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자극의 최소치 또는 최대치를 측정하고 결정하려는 욕망이 발견한 한계, 또는 수준이다. 심리학자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김도희 역시 감각의 크기 변화에 집중하면서 자극의 최소치, 또는 최대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강렬한 자극이 더 이상 강렬하지 않게 되는 지점은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콘크리트 시계>(2011)의 매 순간을 기록한 14일간의 일지에는 유달리 수치(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몸의 맥과 압”)가 많이 등장한다. 다음과 같은 식이다. “14:00 물을 마신 후 오전에 받은 베이글 반 개에 딸기잼을 발라먹었음. 혈압 108-67 심박수 98, 체온 38.2”(8일째), “11:00 대추라떼 천천히 마신 후 혈압을 쟀음 86-55-90 맥박이 좀 느려졌음, 볼펜을 들어 뭔가 적는 짓이 매우 귀찮음”(10일째) “12:00 세탁기가 돌아가는 시간 99분 동안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눕혀 둔 냉장고 주변을 걸었음”(11일째) 이 일지는 14일째에 마무리되는데 왜냐하면 그 시점에서 그녀는 자기 몸이 주어진 조건에 적응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 뇌의 뉴런…구석구석들은 리셋되어 이제 안정된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노릇을 끝낼 때가 왔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새로운 환경에 혼란과 고통을 겪은 몸은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혼란과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 환경이 몸에 가하는 자극들의 물리적 강도는 여전한데도 말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아기를 키우는 엄마는 어느 순간 아이의 오줌 냄새에 둔감해지고, 조현병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은 어느 순간 그이의 악쓰는 고함소리에 무덤덤하게 될 것이다. 김도희는 어떨까? 내가 보기에 이 작가의 작업에는 자극에 둔감해지는 지점, 또는 무덤덤하게 되는 시점을 결정하려는 태도가 은근히 두드러진다. 다시 그녀의 인터뷰를 인용하면 “한계점에 가까이 가서 뭔가를 확인하면서 그 불능의 상태를 이겨내는 혹은 소화하는 그런 계기”(강조는 필자)가 중요하다. 이 인터뷰에는 “최전선까지 가면 마음이 조금, 후련, 만족 그런 이상한 게 있어요”라는 발언도 등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도희의 작업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새로운 환경, 새로운 자극보다는 차라리 그 환경, 자극에 내 몸을 일치시키는 일, 또는 그에 적응하는 것일 수 있다. 한낮의 뜨거운 바위 위에서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른 퍼포먼스 <Howling>(2015)의 후일담에서 이 작가는 “나를 제약하던 껍질이 모두 열려 나와 만나고 세계와 일치되는 것 같은” 경험을 말했는데 나의 눈길은 유독 ‘일치’라는 단어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치’의 예술적 함의는 무엇일까?

 

3. 감각의 동기화, 윤리적 리듬

  2015년 김도희는 속칭 미아리 텍사스촌(하월곡 88번지)에서 1인 프로젝트 <벽, 잠행, 바닥>을 진행했다. 그것은 10여 년쯤 발생한 화재 이후 방치된 성매매업소 건물들을 잠행하며 거기 쌓인 쓰레기를 치우고 재를 닦아낸 작업이다. 코를 찌르는 악취 속에서 그녀는 불탄 검은 벽지를 닦았다. 그 밑에서 장미무늬 벽지가 또 그 밑에서 들꽃무늬 벽지가. 그리고 그 밑에서 …핑크색 꽃눈이 내리는 벽지가 그 밑에서 흑장미무늬 벽지가 그리고 마침내 콘크리트 벽이 나왔다. 아마도 콘크리트 벽을 마주할 때쯤 그녀의 몸은 공간을 지배하는 먼지와 악취에 어느 정도 적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그녀의 이전 작업처럼) 자기 몸을 감당 가능한 자극의 한계치로 밀어붙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여기서 새로운 몸틀을 구성하는 과정, 즉 자극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몸을 새롭게 구조화하는 과정은 한 때 그 공간에 거주했던 누군가의 삶의 흔적과 궤적을 고스란히 마주대하는 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내 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극을 감내하는 노동은 결국 타자와 만나는 일로 귀결됐다. 그것은 “실핏줄을 나누는 것들을 헤아려” 보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타자와 관계를 맺는 일은 그가 내게 선사한 자극들-냄새와 소리와 색깔들 따위들을 감내하고 그에 익숙해지는 일에서 비롯된다. 세계와의 만남은 어떠한가? 그것은 세계가 내게 제공한 낯선 소리와 냄새들에 익숙해지는 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을 감각의 동기화(synchronization)이라 부르면 어떨까? 부산 영도에서 조부모와 함께 유년기를 보낸 김도희의 경우에 세계와의 만남은 강도 높은 깡깡이 소리, 즉 선박의 녹을 연막기로 벗겨내는 소리와 마주 대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조부모에게 맡겨진 나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선박의 녹을 벗겨내는 소리로 아침에 눈을 떴다”(작업노트, 2017) 어린 김도희는 그 소리와 더불어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을 것이다. 또는 그 소리에 육화된 몸들에 자신의 몸을 일치시켜야 했을 게다. ‘하월곡 88’프로젝트에서 건물 벽면을 닦아내던 것과 거의 유사한 열정으로 갤러리 벽면을 연마기로 갈아 그 기저의 지층들(사연 많은 속살들)을 드러낸 <살갗 아래의 해변>(2017)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살갗 아래의 해변>이란 깡깡이 작업에 나선 할매(들)의 강도 높은 노동의 리듬과 박자에 자기 몸을 실어 동기화해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그런가 하면 <피 속의 파도>(2017)에서 파란색 유광페인트로 칠한 벽면은 부서진 생선상자들의 뜨끈하고 질펀한 냄새와 뒤엉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것은 이 작가가 영도 시절에 익숙해져야 했던 파란 벽면의 리듬을 되살린 것이다. “할배가 습관적으로 개수대 옆 벽에 뜨거운 오줌을 갈겨대는 통에 파란색 페인트벽은 쉽게 벗겨졌다. 그는 수시로 그 위에 파란색을 덧칠했다. 체액을 머금고 두꺼워진 페인트벽 덕에 여름이면 생선피냄새와 오줌냄새와 술냄새가 더 진해졌다”(작업노트, 2017)

  그러나 타자의 리듬에 내 리듬을 맞추는 일, 그 강렬한 것들과 몸을 부대끼고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고통스럽다고 할 만한 어떤 것이다. 게다가 많은 경우에 주어진 조건에 감각을 일치시키는 일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에 해당한다. 누워있는 아기에게 아버지가 내는 소리, 어머니에게서 나는 냄새들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적응의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철든 이후에 그것을 감내하는 일은 또한 의지와 예의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금 의지와 예의의 문제만이 아니다. 방금 전에 나는 <피 속의 파도>의 뜨끈하고 질펀한 냄새를 운운했는데 내 몸은 그 냄새에 곧장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참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를까 두려워 금새 그 전시장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버렸다. <피 속의 파도>, 그 ‘피의 리듬(wave)’에 내맡길 만큼 내 몸이 숙련되어 있지 않은 탓이리라. 그런데 내 몸은 그것을 놀라우리만치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래 층 전시장에서 수산시장의 떠들썩한 리듬에 몸을 맡기자 그 비릿하고 질펀한 냄새가 내 코를 맴돈다. 거기서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데도 냄새가 난다.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비릿한 맛이 입가를 맴돈다. 내 ‘혀뿌리’가 그것을 기억하는 것일까? 그리고 몇 시간 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잊고 지냈던 오랜 기억이 떠올랐다. 그 더운 여름날, 부산의 오래된 수산시장에서 투병 중인 아버지와 식당 한쪽에 앉아 나란히 앉아 그 냄새를 맡으며 소주를 마셨다. 다른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뜨끈하고 비릿하고 질펀한 소주 맛, 아니 그 의자에서 나던 냄새는 왜 이렇게 생생한가? 아니 왜 이렇게 아픈가?

 

홍지석(Hong Ji-Suk, 미술비평, 단국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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