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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 / 몸을 호출하고 타자화하기-고충환

 

<무제. 2003. 비디오.>

 

​물과 함께 오물이 변기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비디오로 녹화하고, 녹화된 필름을 거꾸로 되감아 보여주기를 통해 마치 변기구멍 속으로부터 오물이 역류하는 것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이 장면에서 변기구멍은 마치 삼킨 음식물을 게워내는 목구멍처럼 보인다. 변기구멍과 목구멍이, 오물과 음식물이, 싸는 기관과 먹는 기관이, 무기질과 유기체(몸)가 그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통합된다.

 

<김도희_신치로이드 60_2003>​

 

​신치로이드 60은 갑상선 호르몬 분비 이상에 기인한 무기력, 우울, 저체온, 저혈압,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 그리고 언어장애 등등의 증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처방되는 약물이며, 작가는 2006년 현재까지 17년째 매일같이 이 약물을 복용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도 지금도 여전히 복용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의 증상을 소재로 한 이 작업은 구겨지고 낡은 장지 한 장이 전부다. 한 달간 약물을 끊고 신체적 고통에 맞서 싸우면서, 이 장지를 깔거나 덮고 생활하며 그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그러나 정작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장지 한 장 일뿐, 장지에 내재된 고통은 보이지도 않거니와, 장지의 흔적을 고통의 흔적으로 읽지도 못한다.

 

작가의 이 작업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그 무엇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구겨진 종이)에 비해, 볼 수 없는 것(구겨진 종이에 담겨진, 작가의 극심했던 고통의 실체와 흔적)은 다만 시각의 한계에 지나지 않으며, 이로써 작가는 (대개는 이처럼 그 자체 불완전한 시각정보에 의존하기 마련인) 판단의 오류를 자각시키고 있는 것’이다(오상길).

 

<무제. 2004.>

 

​이 작업에서 작가는 접착테이프의 접착 면이 전면을 향하도록 캔버스를 촘촘하게 감싼 후 대기 중에 방치한다. 그리고 그렇게 방치된 일정기간동안 캔버스 표면에 접착된(붙잡힌) 먼지, 머리카락, 벌레,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세 오물 따위를 보여준다. 이로써 이 작업은 캔버스 자체가 외부환경에 반응하게 한 것이란 점에서 반응하는 캔버스, 끈적이는 캔버스, 몸이 된(체화된) 캔버스, 유기체적 캔버스, 그리고 일종의 먼지그림을 실현하고 있다. 그 의미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화면 자체가 곧 살(유기체적 몸)인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루시앙 프로이드의 전언과도 통한다.

 

<손톱산수. 2004.>

 

​이 작업에서 작가는 전통적인 산수화 중 겸제 정선의 <만폭동도>를 재현한다. 그런데, 그 재현하는 방법이 예사롭지가 않다. 샌드페이퍼를 연이어 붙여 대형 화면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자신의 손톱으로 드로잉 하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지두화를 너무 맹렬하게 그린 나머지 일시적으로 지문이 다 지워져 없어졌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경우와 그 정도로 치자면, 작가의 이 작업은 지두화와 비교가 안 된다. 흔히 그림을 작가의 분신이나 혼에 비유한다. 그러나 작가에게서 이 말은 더 이상 비유법이 아닌, 말 그대로의 몸이 그린 그림 곧 몸 그림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액션페인팅 곧 몸 그림은 작가의 경우에 적용되어져야 한다.

 

실제로 해보면 알겠지만, 사포에 손톱으로 그림을 그리면 얼마 그리지 못하고 손톱이 다 닳아 없어진다. 그리고는 그림을 계속 그리기 위해 손톱이 다시 자라기를 기다려야 하고,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그렇게 손톱이 닳아 없어지고 재차 자라기를 몇 번이고 거듭해야 한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이 작업은 완성하기까지 수 달(2004년 6월에서 9월까지)이 걸렸으며, 이 기간은 그대로 그동안 자란(사실은 닳아 없어진) 손톱의 생장기간에 해당한다. 이 작업은 말하자면 손톱의 생장기간을 기록한 것이며, 손톱의 생육을, 몸의 생육을 그린 것이다.

 

<시간비우기(혹은 폭파되는 머리). 2004.>

 

​일체의 선입견을 지우고 생각해보면, 가장 존재론적인 예술(혹은 예술이 가장 존재론적이게 되는 지점)은 무엇일 수 있을까? 아마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낱낱이 반추하고 헤아리고 기록하는 행위가 아닐까. 로만 오팔카가 그 시간을 숫자로 기록한다면, 작가는 한글로 기록한다. 작가는 그 표면에 일련의 연속된 숫자를 한글로 기록한, 가늘고 좁은 띠 모양의 종이를 머리에 칭칭 감아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는 머리가 그 띠의 다발에 파묻혀 사라지게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낱낱이 기록하고 헤아리고 반추하는 행위와 과정을 통해서 그 삶의 시간을 반추하는 머리, 반성적인 머리, 자기반성적인 머리를 지워지게 한 것이다. 아마도 통증을 잊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고, 자기와 대면하고 싶다는 강박적 자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는, 이 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저마다의 존재론적 상처에 직면하게 한다.

 

​<죽어라. 2005.>

 

​작가는 이 작업에서 그 속에 금붕어가 노니는 평면 패널 형태의 수조를 벽에 걸어 설치하는데, 그 투명한 수조 이면의 벽면에 ‘죽어라’는 문자를 써놓았다. 죽어라? 정녕 죽으라는 말인가? 죽는 게 차라리 낮다는 말인가? 수조 속에 노니는 금붕어들은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무심할(자유로울) 뿐이다. 아니다. 결코 무심할 수가 없다(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금붕어들은 안전한 수조 속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정작 그 보호, 그 행복의 느낌은 사실은 감금임을 주지시킨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안전한 질서와 체제와 더불어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안녕의 느낌은 사실, 제도에 길들여지는 것(애완)임을 주지시키는, 역설적인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다.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인가? 2005.>

 

​씨앗을 심고 자라는 만큼의 크기 그대로 드로잉을 하고, 이를 재차 최대크기로 확대해 디지털 출력했다. 주지하다시피 디지털미디어를 통해 이미지를 확대하면, 이미지의 형태는 픽셀의 단위구조로 환원된다. 그리고 확대가 더 진행되면서 이미지는 마침내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것 같은 그 화면 속엔 그렇게 지워지고 없는, 부재하는 이미지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존재를 내재하고 암시하는 부재, 혹은 존재를 증명하는 부재라고나 할까.

 

이 작업에서 작가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님을 주지시킨다. 그 주지가 롤랑 바르트의 ‘너덜너덜해진 양피지’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즉 종이가 없던 시절에, 양피지에 어떤 사실(이를테면 주체의 의미)을 기술하고 나면, 즉각 그 기술을 수정하는 생각이 뒤따르고, 그렇게 수정된 생각이 지워진 양피지 위에 덮씌워진다. 기술과 생각의 차이가 거듭되고, 기술과 재 기술이 중첩되면서 이를 받아 적은 양피지는 마침내 너덜너덜해진다. 현재 양피지 위에 기술된 의미마저 사실은 머잖아 수정되고 지워질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궁극적인, 결정적인 의미 같은 것은 없다. 모든 의미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임을 피할 수가 없다. 하나의 사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진정한 의미는 현재 기술되어져 있는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면에 지워진 모든 의미를 포함한 그 무엇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란 현재 양피지 위에 기술되어진 의미보다는, 양피지 이면의, 그 의미들의 흔적들, 그 흔적들이 만들어준 얼룩들, 그 얼룩들이 암시하는 차이들의 연쇄, 차이 나는 의미들의 연쇄로부터 온다. 존재는 부재로부터 건너온, 건네진, 부재의 한 부분, 한 속성이다.

 

그런가하면,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인가?’ 라는 동어반복적인(사실은 그 이면에 차이를 내재하고 있음으로 동어 반복적이지 않은) 이 작업의 제목은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라는 동어반복적인 프랭크 스텔라의 단정적인 전언에 대한 반응이나 답변처럼 들린다. 주지하다시피 스텔라의 이 말은 모더니즘 서사의 정점에서 나와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형식적인 국면들)이 전부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작가의 반응 혹은 답변은,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암시며 상기며 기호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암시며, 형식은 의미의 상기며, 존재는 부재의 기호라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이 작업은 순수형식에 대한 강박에 의해 견인되는 모더니즘 서사를, 그 독법을, 그 준칙을 교정해준다.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인가? 2005.>

 

​같은 제목의 이 작업에서 작가는 한정된 공간 내의 사람들에게 사과를 베어 먹게 한 후, 같은 공간에서 채집한 머리카락을 사과에 부착하고, 방치한다. 부패한 사과에 붙어있는 머리카락과 먼지들은 서로 기생하고, 서로에게 숙주가 된다. 부패한 사과는 머리카락과 먼지에 기생함으로써 부패를 실현한다(최소한 진작시킨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먼지는 부패한 사과로 인해 자신의 존재성이 다름 아닌 부패임을 드러내고 증명한다. 머리카락과 먼지는 존재와 관련하여 예사롭지 않은 어떤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사과는 몸(쾌락기관으로서의 입과 이빨과 혀, 그 자체 죽음을 암시하는, 신체의 부수물인 머리카락과 먼지)과 만나면서 그 형과 질이 변한다(부패한다). 이로써 작가는 베어 문 흔적이 여실한 사과를 일종의 전형적인 코드로서 사용하고 있는 바니타스 정물화를 나름으로 각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숨쉬기. 2005.>

 

이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밀폐된 비닐봉지로 온몸을 봉한 채 좌선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은, 무슨 수술자처럼 양쪽 콧구멍에 가녀린 호스를 꼽고, 그 호스의 끝이 비닐봉지 바깥과 연결되게 해, 그 호스를 통해 흡입한 공기를 입으로 내뱉어, 비닐봉지를 팽창시킨다. 순수하게 자신의 호흡만으로 봉지를 부풀리고, 형태를 만든 것이다. 작가의 이 작업은 피에르 만조니의 <예술가의 호흡>이란 작품을 연상시킨다(만조니는 예술가의 똥이란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호흡이 만든 조형물로써, 흔히 손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란 선입견을 재고하게 하고, 자신의 숨결을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단순한 시각정보와 그 경험에 초점이 맞춰진 미술의 용법을 재고하게 한다. 더불어 작가의 이 작업은, 몸이 갖는, 한계상황에 대한 무슨 형식실험처럼도 보인다.

 

<미친 나무 - 마비된 곳을 찌르다. 2005.>

 

이 비디오 영상은 미친 듯이 떨고 있는 나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무가 미치거나 떠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사실은 미친 듯이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연출한 것이다. 약간씩 다른 위치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랜덤하게 재생해 흔들림을 연출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무가 미치거나 떠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이 단정할 수 없음이 이 작업의 핵심이다). 나무가 내가 아닌 것만큼이나, 나 또한 나무가 아니며, 그런 한, 나무와 나는 불통의 관계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무의 미침과 떨림을 어찌 알랴. 결국, 이 작업에서 작가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비록, 나무의 격렬한 떨림이 작가의 작업을 존재론적으로 보이게도 하지만). 작가는 말하자면 ‘착시원리를 통해 시간성과 착시현상에 기만당하는 지각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오상길)이다. 마비된 곳을 찌른다는, 이 작업의 부제처럼, 작가의 이 작업은 마비된 지각을 찌른다. 그리고 지각을 지금보다 더 진작시키면, 나아가 아예 지각을 넘어서면, 나무가 미치고, 떨고,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지각의 회복과 확장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심안을 통해, 나무와 내가 심정적으로나마 서로에게 동화되는 경지를 말할 것이다. 심정적인 동화야말로, 침묵 속에 잠든 세계를 일깨울 수 있게 해준다. 심정적인 동화 말고는, ‘존재자의 피막을 찢고 존재(혹은 존재 자체)에 이르는 길’(하이데거) 같은 것은 없다.

 

<이도 저도 아닌.더 진실한 모습을 재현하는데에 따른 어려움 2005.>

 

​작가는 이 비디오 작업에서 발칙한 상상력(?)을 도발해 보인다. 의식이 없는 사람(아마도 술에 취한 노숙자?)의 눈꺼풀을 강제로 벌린 후, 이를 클로즈업으로 촬영한 것이다. 물론, 영상에는 이런 정보, 이를테면 작가가 자신과는 일면식도 없는 익명의 누군가의 눈꺼풀을 강제로 뜨게 했다는 사실은 들어있지가 않다. 위험하기도 하고, 맹랑하기도 하다. 여하튼,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일은 아닌데, 작가는 그 일을 했고, 거침이 없다. 사족이지만, 사족이 아니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을, 그 경계를 교란시킨다. 주지하다시피 눈은 교감신경계에 속한다. 나의 의지가 눈을 뜨게도 하고, 감게도 한다. 그런가하면 극한상황에서 눈은 부교감신경계에 속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은 저절로 뜨여지고(놀랄 때), 저절로 감겨진다(졸릴 때).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의식이 없는 사람의 눈꺼풀은 저절로 감겨지기(부교감신경의 속성을 따르는) 마련인데, 작가는 그 눈꺼풀을 강제로 뜨게(교감신경의 속성을 내보이는) 한다. 부교감신경계통으로 하여금 교감신경 되게 하기를 (강제로) 실행해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잠자는 자의 눈꺼풀을 강제로 뜨게 하는가. 진화론의 견지에서 보자면, 부교감신경(수동태)은 동물에 가깝고, 교감신경(능동태)은 인성에 가깝다. 나는 쉬고 싶고, 자고 싶은데, 제도는 그 쉼과 잠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자연과 더불어 안주하고 싶은데, 제도는 나로 하여금 자연을 거부하게 하고, 나아가 자연을 박탈한다. 이로써 작가의 이 작업은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서로 화해하고 화합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논평처럼 읽힌다(여기서 작가는 졸지에 제도를 대리하게 된다).

 

<월광. 2006.>

 

10여분동안 1회 회전하는, 달 이미지를 보여주는 비디오 영상작업이다. 이우러지고 차는, 달의 변화 주기는 여성의 생리 주기와 일치한다. 달의 변화 주기와, 물이 들고 나는 조수 간만의 차이, 그리고 여성의 생리 주기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 여성성에 대한 신화적이고, 상징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달 속에 들어있다. 월광이라는 제목은 우수, 낭만, 죽음, 재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기를 연상시킨다.

 

<작용과 반작용. 2007.>

 

​이 비디오 작업에서 작가는 젖꼭지에 빨대를 대고 입으로 빨아들여 근육이 부풀게 한 다음, 입을 떼면 재차 처음 상태로 되돌아가는 근육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작용과 반작용 현상을 인위적으로, 강제적으로 연출해보임으로써 외부현상에 대응하는 몸의 반응을, 몸의 현상을, 몸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마도 몸을 매개로 해서, 자극(이를테면 폭력 같은)에 대한 몸의 반응을 매개로 해서, 작용과 반작용,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시선(주체 곧 관객의 시각)과 응시(객체 곧 몸의 시각)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몸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극적인) 순간을 붙잡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빛, 진리, 생명. 2008.>

 

​이 작업에서 작가는 화분에 심겨진 식물과 TV 모니터를 마주보게 설치했다. 주지하다시피 식물은 생육을 위해 빛이 필요하고, 그 빛을 섭취하기 위해 빛 쪽으로 생장하는 습성(광합성을 위한 해바라기?)이 있다. 여기서 작가는 자연광 대신 모니터화면을 통해 발해지는 전자광(인공광)에도 역시 자연광에서와 똑같은 반응을 보이며 생장하는(모니터 쪽으로 기울어지는) 식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식물이, 그 빛의 성분이 자연광이 아닌 인공광임을 알고나 반응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분명한 점은, 여하튼, 식물이 자연광에서와 똑같이 인공광에도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이 작업은 거대담론에 대한 유비처럼 읽힌다. 이를테면 제목에 나타난 빛, 진리, 생명은 거대담론의 핵심적인 개념들이다. 여기서 모니터는 소여된 조건, 선험적 조건을 상징하고, 그 빛에 반응하는 식물은 존재 일반을 상징한다. 존재와 선험적 조건은 서로 단절돼 있어서 서로의 자장 속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선험적 조건의 장과 연결돼 있고, 식물은 자연광에서와 똑같이 인공광에 대해서 반응한다. 인식론적으로 단절돼 있지만, 존재론적으론 상호 작용하는 것(연동돼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 작업은, 동시에, 일종의 인지과학이나 인공지능을 예시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마침내, 자연현상(자연광)을 대체하기에 이른 과학(인공광)의 실체를 예감케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존재의 맹목적인 관성(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달라지기 이전과 똑같이 반응하는. 그리고 변화된 체제에 자동적으로 적응하는)을 되돌아보게 한다.

 

<말줄임표. 2008.>

 

​화장지에 혈흔을 찍어 말줄임표를 재현했다. 몸과 개념의 차이? 몸과 기호, 몸과 의미의 건널 수 없는 간극(몸은 의미화 되기를 거부한다)? 몸의 언어(나는 내가 말해지는 곳, 여기에, 개념화의 과정 속에 없다)?

 

​<김도희_생선 말리기,임연수_300W 할로겐 조명, 선풍기_가변설치_2009>

생선 말리기. 2009.

 

​생선을 말리기 위해선 포를 떠야 하는데, 그렇게 포를 뜬 형상이 무슨 푸줏간에 걸린 고기나, 사람형상, 심지어는 책형상의 전형적인 도상을 떠올리게 한다. 할로겐 조명이 그 피부질감을 푸르스름하게 하고, 번들거리게 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의 이 작업은 푸줏간에 걸려 있는 고기를 보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왜 쟤가 있지?’라고 중얼거린 프랜시스 베이컨의 자책어린 독백을 연상시킨다. 베이컨은 돼지고기란 뜻이고, 따라서 베이컨이란 이름 속엔 고기(자신을 고기와 동일시하는 존재론적 자의식)가 들어있다.

 

<더 진실한 소리를 재현하는 데 따른 어려움. 2009.>

 

​이 작업에서 작가는 입을 벌린 채 소형 마이크를 삼키는 모습을 클로즈업한 영상과 함께, 마이크에 녹음된 소리를 재생한다. 더 진실한 소리? 몸의 소리? 우리는 말을 할 때 침을 ‘꿀떡’삼킨다. 화가 날 때면 볼을 ‘실룩’거리고, 뭔가 아니다 싶은 일에 맞닥트리면 눈알을 ‘뒤룩뒤룩’굴린다. 비교적 움직임이 큰 몸동작에 수반되는 소리들이지만, 정작 대부분의 몸이 내는 소리는 듣지 못한다. 몸말(몸 소리?)은 의식적인 말과 동시에 말해지는 것이지만, 의식적인 말이 상대방에게 가닿는다면, 몸말은 그 과정에서 증발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의식적인 말과 몸말 중 진정 내가 속해져 있는 말은 의식적인 말이 아닌, 몸말인 경우가 많다. 결국, 내가 하는 대부분의 말들은 상대방에게 가닿지 못하고, 나에게로 되돌려진다. 아마도 더 진실한 소리란, 단순히 몸에서 나는 소리(생리적인 소리? 몸의 소리?)가 아니라, 이런, 몸말일 것이다. 작가의 이 작업은, 비록 소리와 말이 다르지만, 이런, 몸말의 재생하기에 따른 어려움을 암시한다. 그리고 말, 의미, 개념보다 소리가 선행하는 것임을 주지시키고, 말, 의미, 개념이 소리에 연유한 것임을 주지시킨다. 더불어, 말, 의미, 개념의 원인(원형)을 (관념이나 추상이 아닌) 몸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유물론적 태도를 엿보게 한다.

 

<무제. 2009.>

 

​이 작업에서 작가는 선행자(?)가 벌려놓은 행위의 흔적으로부터 자신의 작업을 풀어낸다. 단순히 기생의 논리에 환원된다기보다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선행자에 의해 일종의 눈사람이 주어졌는데, 몸통에 검은 먹물을, 머리에 허연 설탕을 뒤집어쓰고 있는, 신문을 뭉쳐 만든 눈사람이다.

 

작가는 이 눈사람의 머리에 나뭇잎을 갈아 만든 작은 무더기들을 쌓아놓고, 돋보기로 태운다. 눈사람이 무슨 사람이나 되는 양 쑥뜸(엄밀하게는 나뭇잎 뜸)질을 한 것이다. 이렇게 머리에 불이 난 것을 시작으로, 작가는 아예 작정하고 눈사람 전체를 태워 없앤다. 엄밀하게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을 매개로 해서 눈사람 모형을 재로 변질시킨다. 일종의 연금술적 술수를 감행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재는 파괴의 결과물이면서, 이와 동시에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 이로써 작가는 말하자면, 재가 갖는 상징적 의미에 기대어, 파괴와 재생, 죽음과 삶을 결합시키는, 일종의 양가성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후행자(?)가 작가의 재로부터, 또 다른,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고, 풀어내게 했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전시기획자로서의 기지마저 발휘한다. 평소, 작업과 함께 전시를 기획해온, 작가가 직접 기획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특이한(?) 전시 방법론을 내놓는다. 수 명의 작가들이 작업에 대한 사전의 협의 없이(물론, 전시진행방법과 관련한 최소한의 협의과정은 있었지만), 선행자가 벌려놓은 행위의 흔적으로부터 후행자가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고, 이를 근거로 재차 후후행자가 자신의 또 다른 작업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전시를 진행시켰다. 전시방법과 관련한, 주목할 만한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로 생각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김도희는 끊임없이 몸을, 몸의 증상과 징후를, 몸의 생리와 관성을 호출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남의 몸을 가리지 않고 타자화한다. 그렇게 몸을 호출하고 타자화하는 과정이 때로는 생경하고, 때로는 공격적이지만, 대개는 진지하다. 타자화된 몸을 직면하는 것은 이처럼 언제나 생경하고, 공격적인 경험이다. 타자화된 몸은, 정신의 기획(순수관념에 대한 강박에 의해 견인되는)에 대해,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획(몸을 성 상품화하는 쾌락원칙에 의해 견인되는)에 대해, 존재의 기획을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여기서, 존재의 기획이 몸으로부터 진정성을 얻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끊임없이 자기(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로 되돌려지는, 존재에게로 되돌려지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실상, 작가의 작업은 경향성이 암시하는 환원주의와는 그 거리가 멀지만)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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