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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의 <죽은 나무에 물 주기>

 

 

 

길가다가 이런 부탁한 건 네가 처음이야....

 

 

 

1

혈액공급관리부처

 

고독은 외로움과는 다르다. 외로움이 자신의 살에 대한 그리움에서 오는 시간이라면 고독은 자신의 피를 생각하는 시간에 다름 아니다. 살은 외로울 때 피 바깥에서 더욱 붉어지지만 피는 고독할 때 살 속에서 가장 희미해진다. 외로움이 자신의 감정에 길들여지는 애조라면 고독은 자신의 감정을 밀어내는 산조에 가깝다. 외로움은 언제나 타자를 향해 외치지만, 고독은 타자로부터 가장 멀리 있을 때 스스로의 단독으로 의사소통을 시작해 간다. 외로운 자들은 늘 뜨겁지만 고독한 자들은 늘 서늘하다. 우주는 고독한 생명을 조금씩 알아가는 세계이다. 한 사람의 우주에 대해 우리가 자신의 피를 거쳐 태어난 시간을 마련해 갈 때 사랑은 시작된다.그때부터- 사랑을 시작하기 시작하는- 그 사람의 눈은 어느 이름 모를 행성의 궤도처럼 떠다니기 시작한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행성에 잠시 머물러 보는 거다. 그 행성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돌아가는 방향을 잃어버리는 이미지를 제공해 줄 뿐이다. 고독은 방향이 없는 이미지다. 자신의 태생을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아직 태어나지 못했다는 태기를 끊임없이 느끼고 살아야 하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심술스럽고 우아한 이미지. 고독은 자신을 다른 인간으로 옮기고 있는 자의 현실이다. 외로움이 섬의 이미지에 충실하다면 고독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채 물 속 깊이 떠다니는 슬픈 대륙의 이미지다.

 

 

고독에 관해 궁금해 질 때, 절실하고 우수에 가득 차 있으면서 우아한 간증이 그리울 때 마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꺼내본다. 드라큘라는 매혹적이다. 드라큘라는 고혹적인 사계에 산다. 드라큘라는 피를 모으는 계절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무수히 짓는다. 드라큘라의시간은 존재하지만 드라큘라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로워 지는 순간마다 그는 자신의 피에 흩어진 채 오열한다. 성은 드라큘라의 거주지가 아니라 드라큘라의 눈이다. 피로 만들어진 드라큘라의 성을 상상해보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드라큘라에게 가장 멀리 존재하는 육체의 부위는 눈이다. 자신의 눈에서 가장 멀리 살 고 있는 드라큘라를 상상하면 그의 피 맛이 궁금해진다. 드라큘라는 늘 피를 필요로 하지만 자신의 피를 마실 수 는 없다. 피를 부르는 입술을 가졌지만 자신의 피 냄새를 가장 그리워 한다. 자신의 피를 그리워하도록 태어난 생명체는 그리움을 앓는다. 그는 자신의 피 속으로 흘러들어가기 위해 수백 년 동안 바람이 되고 음악이 되고 짐승이 되어 떠돈다. 사람들은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나 그의 놀라운 수명에 압도당하고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리움에 경악한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드라큘라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피 눈물이 고인다. 그는 고독하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고독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들어 와서 특별한 피가 되어 울렁이는 고독의 세계에서 그는 죽지 못한다. 피가 말라가는 고통으로 밤마다 눈을 뜨고 피를 데리고 떠나는 몸으로 그는 여행을 멈추지 못한다.

 

그녀(김도희)는 그 피 곁을 서성거린다.

그건 뭐랄까? 작가란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들의 혈액공급관리를 끝까지 충실하게 해주는 자로서 정언법을 고수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그녀의 작가적 고집도 이 이야기의 한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2

콘크리트 시계의 산통기

 

그녀의 <죽은 나무에 물 주기>는 몸으로 통과해낸 산통기다. 그녀는 자신이 고안한 몸들을 통과 해내며 독특한 산통을 겪는다. 그 산통이 그녀의 곁에서 무엇을 차지했는지, 어떠한 산욕을 불러일으켰는지 이쪽에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녀가 <콘크리트 시계>라고 명명한 세계- 18일간의 5월 22일부터 6월 8일까지 하루 24시간 전시 공간에 머무는 행위- 의 기록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낙서를 남기는 일은 무의미해 보인다. 전시 공간에 거주하며 외부인들이 던져주고간 물품반입의 절차를 기록하고 외부인들이 툭! 던지듯 내던지고 간 말 한마디 한 마디의 의미적 연관을 배열하고 축척해내는 일은 그녀의 작업의 생태계와 무감해 보인다. 그녀는 그 공간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몸을 배워갔고 그 몸으로 대상을 받아들이고 이야기 하는 방식에 가까운 화법을 받아들이는데 이 시간을 쓴 것 같다. 그녀는 점점 말라갔고 점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로부터 물러나는 듯 했다. 그녀는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그 세계로 들어가서 자신안의 숨겨진 불구를 발견하고 그 불구로 허령불매를 끌어 들였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듯이 기묘한 이 작용은 다른 몸으로 건너가는 산통기를 남긴다. 그곳에서 매일 써나간 그녀의 기록은 한 예술가의 새로운 작업에 들뜬 산욕의 신열과 인간의 허랑을 비우고 몸의 육기를 비우는 작업에 가깝다. 그녀는 사방이 컴컴한 이곳에 있으면 아침에 빛이 아니라 소리로 눈을 뜬다고 말했다. 빛이 불필요해 보일정도로 망막이 흐물흐물 해지고 몸의 어느 부위보다 소리에 반응하며 귀로 먼저 눈을 뜨는 이 지하의 습도는 그녀의 다른 피가 되었다.

 

그녀는 스티로폼에 누워 자며 자주 자신의 맥박을 확인 해 보았다. 그녀를 처음 찾아가서 보았던 첫 번 째 떠오른 이미지는 물 속 깊은 곳을 떠다니는 숨겨진 대륙의 이미지였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찾아가서 보았던 이미지는 수면으로 계속 가라앉고 있는 <물 속의 섬>이 였다. 불콰한 생각이었지만 누군가 이 고혹과 피로에 겹친 몸을 보고 그녀의 목을 물어뜯고 가랑이를 벌리고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그건 그녀가 이곳에서 만들어 가고 있는 기묘한 몸을 향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몸으로 들어가 수류탄을 던지고 돌아오고 싶은 충동심같은 것도 아니고, 그녀가 이 공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실체에 대해 합류해 보고 싶은 예술가의 육기같은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회칠한 마네킹처럼 뻣뻣하게 굳어갔지만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존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마치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똥을 누듯이, 마치 구름을 발아래 두고 머리위에 땅을 두듯이, 마치 이마 위에 성을 쌓고 발등 위에 섬을 올려놓듯이, 혼몽하고 흐리한 바람 한 줄에도 온 몸의 눈동자가 눈을 뜨듯이, 그건 다른 세계에 대한 관능적인 질투이거나 이름 모를 허기로 인해 피 붙이를 보고 몸이 달아오르는 욕정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불 한 점 없는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채 벽으로 돌아누워 외벽의 숨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들을 불러본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 속에 숨어 있는 다수의 몸을 벗고 잔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과 잠들었고 자신과 잠들어 잤다. 그녀는 겹눈이 되어 외로웠다. 그녀는 한 눈으로 고독해지는 생명을 시라고 부를 수 있는 발음을 얻었다. 자신만의 욕조로 들어가 이 세계의 거주자가 되기 위해. 그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녀의 욕정일 것이다.

네가 죽은 나무에 물을 주듯이

내가 죽은 나무가 되어 너에게 걸어가듯이.

 

 

 

3

위 이미지를 영수 청구함

 

죽은 누이를 위한 곡 1의 비디오 재생작업은 반복으로 움직인다. 한 밤 중 고가도로의 한 복판에서 냉장고는 아래로 추락한다. 약 15미터 아래로 곤두박질 친다. 굉음을 내며 깨지고 파편을 튀기며 부서진다. 대가리가 으스러지고 몸통이 으깨지고 피부가 터져나간다. 이 냉장고의 추락을 반복해서 보고 있으면 불쾌하고 소름이 끼친다. 그러면서도 자꾸 시선을 멈출 수 없다. 이 이미지는 놀랍게도 사운드를 제거했을 경우 더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 그 냉장고를 뒤에서 끌어안고 뛰어내린 것이 틀림없어! 생경한 공포감이란 상상력이 우리가 전혀 마주치지 못한 곳에서 생득력을 얻어가며 생긴다. 외부로부터 나온 상상력은 자극이 되지만 내부에서 발아한 상상력은 공포가 된다. 냉장고가 옆구리에 피를 질질 흘리며 한강의 어딘가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이 기하학적 공포감은 추락의 감각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체리듬과 닿아 있다. 그건 조개가 입 속에서 부서질 때

입 안 곳곳에 생채기를 내고 바다냄새를 흩어놓고야 마는, 문득 입안과 갯벌이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리듬처럼 불쾌하고 걸쭉한 우리들의 자화상처럼. 뒤 돌아보기 싫어지는 풍경처럼. 낯설고 매혹적인 풍경이다.

 

 

죽은 누이를 위한 곡 2는 파손된 냉장고의 장례를 다룬다. 삼베에 광목을 두르고 지요(시신 아래에 깔아 두는 종이)를 이용하고 칠성판(시신을 눕히는 나무판)이 받치고 있다.

이 이미지는 냉장고의 장례를 일차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이미지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 냉장고의 준엄한 표정을 본 듯 하다. 상여를 메고 있는 냉장고는 어딘가로 움직이려 한다. 움직이기 위해 덜커덕 거릴 듯하다. 이미지는 죽었다네. 라고 레퀴엠을 부르며 냉장고는 추락하는 순간 몸체만 남고 냉기는 휘발되었다네라고 말하듯이, 아무도 없는 밤을 틈타서 이 장례 행렬은 움직거릴 것이다. 시신의 마지막 손톱 발톱을 싸 두는 오낭주머니를 찬 채 냉장고는 덜컹덜컹 거릴 듯 하다. 작가 김도희는 냉장고 속의 알콜솜처럼 잠들어 있다. 그녀의 몽유는 이 문을 열고 어디로 나갈 것인가? 에 달려 있을 것이다. 혹은 이 문을 닫고 어디로 사라질 것인가?에 있거나.

 

 

죽은 누이를 위한 곡 3은 2010년 6월 25일 30세의 나이로 투신한 어느 여성의 이부자리와 세탁기, 그리고 그 이불을 세탁하고 있는 세탁기, 그리고 그 세탁물을 전시 공간바깥으로 흘러내려 보내는 과정의 이미지에 복무한다. 세탁물은 찌든 떼가 없다. 하루 종일 맑고 흐미한 물만 흘러나온다. 대가리가 깨진 뇌수처럼. 혹은 삐져나온 내장처럼. 줄줄.

밤마다 그 물에 손을 씻는 자는 30세의 유령일까? 동네의 어린 소녀들이 놀러와서 손바닥에 물을 받아 마신다. 곧 미친년이 될 것처럼. 곧 투신할 것처럼.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있는 사람에게 너 누구니?라고 물은 것처럼, 누군가가 누웠던 자리에는 삶이 아닌 무관심이 대신한다. 밤마다 이 도시를 빠져나가 태평양에 닿는 똥들처럼.

 

 

지하 - 멧돼지 조심

 

콧구멍이 큰 여자가 이빨을 보였다가 괴멸하는 표정을 보였다가 소리를 지르고 우울해하며

세포분열중인 눈동자의 색채를 보인다. ‘너도 당해봐야 알거야!’ 같은 표정으로 영등포구 당산동 5가에 나는 살지요 같은 표정처럼, 달나라에 간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의 표정처럼, 자기 몸 안에서 고성방가를 하고 있다. 장모댁을 다녀온 사위의 분노처럼, 루시나 산후조리 1동 168-56번지의 산모의 우울증처럼 크루즈호가 뒤집어 지면서 내는 비명처럼, 소나타 2865가 전봇대를 들이 받을 때 내는 소리처럼, 록시스로마이신을 삼킨 쥐며느리처럼,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나는 내가 만진 여인들의 살이 저런 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을까? 궁금했다. 모니터속의 그 여자는 그냥 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데...

 

 

 

 

김경주 (시인, 극작가)

 

 

 

 

 

 

 

김경주

 

서강대 철학과 졸업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가 등단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 작품<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를 올리며 극작가로도 활동중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

산문집<패스포트> 희곡집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 문학상등을 수상했다.

현재 시극실험극단 <펭귄 싸일런스>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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