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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해소의 공간

 

김도희의 두 번째 개인전 -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이유

 

 

1.

건물 밖 붉은 벽돌 벽에는 이번 개인전의 제목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둥치의 나무가 쇠줄에 매달려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어둠 속 가운데 바닥에 광목과 삼베로 염을 한 커다란 관 모양의 형체가 칠성판 위에 놓여 있다. 오른쪽 벽에는 한 밤중에 고가 차도에서 냉장고가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광경이 반복해서 영상화면으로 나타난다. 안쪽 구석에는 건물 바깥으로 이어진 긴 호스와 함께 세탁기가 보인다.

그리고 지하 공간에서는 구석의 작은 모니터 화면을 통해 한 여자가 분노의 육성을 토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멧돼지 조심>이라는 제목으로…

주택으로 지어진 공간을 개조한 이층 입구 벽에는 개인전이 열리는 날에 닭을 잡은 후 그 피로 쓴 ‘虛靈不昧(허령불매)’란 글귀가 적혀 있다. 주1) 그리고 공간 안쪽에 작가가 간소하게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작가는 창문하나 없이 폐쇄된 이 공간에서 <콘크리트 시계>라는 제목으로 5월 22일부터 하루 24시간씩 총 14일간 머물렀다. 전시장에서 작가는 외부에서 제공하는 반입품, 그리고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들과 우연한 만남을 가졌다. 원래 작가는 하루 24시간씩 총 18일 동안 전시 공간에만 머물 예정이었으나, 나흘 먼저 스스로 방을 걸어 나왔다.

김도희는 전시 기간 동안 왜 이곳에 머물렀으며, 화이트 큐브 속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배제한 낯선 광경들로 이루어진 이번 개인전의 실상(reality)은 무엇일까? ‘퍼포먼스’도, '의식(ritual)'도 아니면서 스스로를 전시장에 유폐시킨 프로젝트는 어떤 의미와 가치와 있을까? 이번 그녀의 개인전은 자전적 문제일까?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레퀴엠(requiem)일까?

 

2.

작가는 이번 개인전 중 열려 있으나 닫힌, 미풍도 없는 회색 시멘트 공간 속에서 오직 홀로 숨 쉬는 존재로 연명하는 동안의 미묘한 심적, 신체적 변화 등을 낱낱이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은 비록 언어로 진술되어 있지만 내밀한 마음의 상태를 포함한 실제 상황에 대한 진술이어서 형언할 수 없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특정 공간에 한정된 유폐 상황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아시아 각지를 여행하며 삶과 문명의 이면을 체험한 후지와라 신야의 책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나온다. 주2) 신야는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불교도, 기독교도를 각각 한 명씩 방에 가둔다고 설정하는데, 그 방은 앞 뒤 ,좌우, 상하가 새하얀 추상적 공간이다. 이곳에서 누가 제일 먼저 발광하고, 누가 제일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는가를 그는 스스로 묻고 답한다. 그의 대답은 추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성립한 종교를 믿는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힌두교도나 불교도와 같은 구체적인 환경 속에 살아 온 인간보다 오래 버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추상적 공간에서는 자아의식을 신으로 변모시키며, 그렇게 변모된 신을 육체 속에 가둬버리기 때문으로 본다.

이러한 가상실험은 사막 같은 추상공간에서는 강고한 신념의 틀이나 의식이 시간을 지연시켜나가는 수단임을, 그래서 이들 지역의 종교적 특성을 드러내지만, 역으로 ‘존재와 사유’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갖게 한다.

 

김도희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자신이 타자(관람객)의 체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타자에 대한 관찰자가 되는데, 관찰자로서 그의 체험은 타자가 자신들의 생각의 틀을 대상에 덮어씌우는 존재로 드러난다. 이는 그가 개인전 중에 남긴 기록에서도 입증된다.

 

저의 몸이 저의 상상과 충돌하며 그 상상을 우습게 만들어버리던 많은 순간들처럼 많은 이들의 감상 역시 벽에 걸린 한 점의 그림을 보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상상의 그림에 말을 걸고 화를내고 배신을 당하기도 하구요.

 

대부분 먹을 것이 문제일 것이라 상상 할 밖에 없고..(저도 그랬었지요..)어떤 이는 제가 넣어준 식품을 먹지 못하는 것을 '끝장을 보려는 태도' 또는 '여유가 없음'으로 오해하고 타박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극단적 사건의 연출을 원하기도 했고...어떤 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나에게도 좋은 것이라 강요하거나 좋은 행동으로 보이도록 제게 연기를 하라고도 하더군요. 저를 완결된 텍스트로 판단할수록 그들은 공간과 전시 자체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덫을 쳐 놓고 미끼 노릇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글은 생경한 마주침과 대비되는 타자의 인식적 프레임을 읽을 수 있다. 작가는 타자의 반응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다. ‘가끔의 혐오는 있었지만 그들은 고기가 아니라 실재였다고.’ 이런 맥락에서 또한 그녀는 물성적 대상으로 만난 관객들은 이전에 추상적(간접적)으로 만난 타인들보다 증오할 만한 대상들이 아니더라는 고백을 한다.

 

이번 전시장 안에서의 작가의 신체적 상황은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극’과 유사하다. 아르토의 잔혹극은 말 그대로의 끔찍함, 또는 포악함이 아니라 기존 관념이나 예술에 대항하는 ‘파괴 행위’극을 말한다. 그렇지만 극이란 틀이 있는 한 사실상 불가능한 이상을 향한 시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아르토의 잔혹극은 인간 존재의 실존적 상황을 드러내는 행위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이런 차원에서 ‘신체는 물질 덩어리이다. 그는 혼자이며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들이란 신체의 적이다.’라는 아르토의 말과, ‘숨 쉬지 않는다면 인간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도희의 진술은 둘 다 개념적 인식을 철저히 부정하는 점에서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인간의 심성도 어디까지나 물적 토대에 기인한 2차적 특성으로 본다. 이러한 점은 그녀가 고가도로에서 떨어지는 냉장고와 볼펜을 비유하며, 냉장고의 크기가 볼펜보다 훨씬 작거나 컸다면 우리가 그 대상을 경험하는 방식 역시 많이 다를 것’이라고 진술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신체(몸)와 심성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신체가 반응하여 만들어내는 심성적이고 감정적인 반응들은 전시장에서 머무는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 처음 밖으로 나온 날의 체험에 대한 기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3)

 

이 글에서 작가는 의식적 사유와는 거리가 먼 실존적 존재로 드러난다. 실존적 존재란 다만 ‘거기에 있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그 자신의 의식과 모순된 존재이다. 그래서 이러한 실존적 자각은 가치 체계화된 언어를 회의하고 거부하는 현대예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김도희 역시 이번 개인전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전람회에서 실존적 존재로서 몸이 먼저 감응하는 방식을 구사해왔다. 이처럼 어떤 대상에 대해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것은 진화심리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작가가 말한 ‘벼랑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배움 없이도 벼랑에서 걸음을 멈추는 아기처럼’이란 말이 그 한 예다.

그래서 냉장고의 추락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정임을 몸이 먼저 감지한다. 물성적 존재인 인간으로서는 그만큼 허망하고 참담한 광경이어서 외면하고 싶은 장면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렇게 추락한 냉장고를 대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실제로 망자에게 하듯이 모든 격식에 맞추어 손수 정성껏 광목과 삼베로 염을 했다. 이처럼 작가가 직접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이 모든 의식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무언가 가슴 저미는 사연과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냉장고에 대해 행한 정성을 다한 염 의식은 무엇보다 어떤 충격적 현실에 대한 죄책감과 살아남은 자로서의 슬픔 등을 견디기 위한 자기 치유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의식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심연은 수직 절벽의 가장자리를 걷는 것처럼 불안하며,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이 심연을 실감한 사람에게는 살아 있는 한 감내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차원에서 냉장고의 추락과 함께 들리는 굉음, 그리고 그것이 관 모양으로 묶여져 있는 상태를 보고, 우리의 사회적 현상인 자살의 증가라든가 허무적 관념을 연상하는 것은 의식의 투사일 뿐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제시된 영상과 사물, 또는 행위는 의식적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멧돼지 조심>이라는 영상에서 볼 수 있는, 한 여자가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말을 거침없이 토로하는 장면은 그러한 언사가 행해지는 대상에 따라서는 상당한 정신적 충격까지 받을 수 있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장면은 합리적인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삶의 단면이다. 삶의 ‘누적 트라우마(Cumulative Trauma)’를 드러내는……

김도희의 이번 개인전은 개인의 직접 경험과 타인과의 간극, 또는 사유와 몸의 모순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시각매체로서 가시화하거나 의미로 체계화할 수 없으며, 실존적 자각으로 생생해지는 삶의 문제이다.

 

3.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인간의 몸과 몸 밖의 근저(根底)인 물성과, 서로 투사하고 공감하는 심성을 화두로 삼았다. 주4) 이런 차원에서 그녀의 개인전은 우리 인간이 물성적 조건 속에서 사는 것 이외 그 무엇도 아님을 여실히 드러낸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한 심리적 투사를 제거하면, 그 대상의 알파와 오메가는 물성만이 남는다. 라캉의 말을 빌리면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존재한다.’

이러한 반 개념적 개인전의 낯 섬, 애매모호성, 불투명성은 합리적, 기계적 사고와 이념에 대한 비판 정신을 전제로 한다. 주5)

이번 개인전에서 김도희는 물성에 기인하는 심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위해 스스로를 전시공간에 유폐시켰고, 그러한 상황이 야기하는 직접적 경험을 견디고 감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그녀의 시도들은 원천적으로 불안한 허무에서 벗어나려는 삶에의 의지, 또는 상처의 ‘해결’이 아닌 해소’로 보인다. 이런 차원에서 작가의 이번 작업이나 전시장 거주 프로젝트는 단지 레퀴엠(requiem)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바탕인 실존적 상황을 드러낸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상황이든 그것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닭을 직접 잡아 손에 피를 묻히는 행위도, ‘죽은 나무에 물주기’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도,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허무를 넘어서고자 하는 삶에의 의지표명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일상을 공개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지시하는 환유적 언어가 아닌 자신과 관람객이 함께 일상의 동어반복에서 벗어난 실재와 삶의 생생함을 공유하고자 한 것이다. 결코 공유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2011년 6월 19일

도 병 훈

 

주1)이 사자성어는 시멘트 벽 한지 위에 닭 피로 단정하게 쓰여 있었다.(개인전 오픈 날 직접 2층 전시장에서 닭을 잡은 후 썼다고 함) 그리고 전시 안내 팸플릿에는 이 사자성어가 사서로 꼽히는 『대학』에 나오는 것으로 뜻과 함께 소개되어 있지만,『대학』에 대한 주자의 해석 글에 나온다. 다분히 도교적, 불교적인 이 사자성어를 통해 공자, 맹자의 원시유교가 신유학자인 주자에 의해 어떻게 변천, 심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

주2)후지와라 신야는 도쿄대학 미술학부 서양화과 중퇴 후 20대부터 30대까지 10여 년 간 아시아 각국을 여행했다. 위 내용과 관련 있는 부분은 (후지와라 신야 동양기행2,김욱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8), 291쪽에 나온다. 그리고 후지와라 신야의 같은 책, 42쪽에는 김도희의 이번 실제 체험과 유사한 부분이 나오는데, 그가 티베트 오지의 라마교 사원(산사)에서 21일간 머물며 겪었던 체험 중에 흙덩어리 같은 그곳 음식을 5일 동안 먹지 못하다가 마침내 먹게 된 과정이다. 그는 당시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다. ‘엿새째 아침이 되자 마침내 혀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나는 이 혁명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주3) 김도희, <일지 이후의 편지>, 마지막 부분 참조

주4)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언어’나 ‘개념’의 반대급부를 지향한 이번 개인전 특성상 용어 선택에 매우 고심했다. 물론 어떤 단어도 ‘실재’의 기호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능한 한 연역적인 용어는 피하고자 했다. ‘퍼포먼스’ 와 같은 용어를 쓰지 않거나, ‘물리(物理)’ 대신 ‘물성’을, ‘심리(心理)’ 대신 ‘심성’이란 말을 쓴 것도 이 때문이다. 물리, 또는 심리할 때의 ‘리理’란 그 어원상 연역적인 이치를 전제로 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주5)이런 차원에서 보면 불교철학에서 ‘공空’과 ‘불립문자’를 말하는 것과, 현대 사상가들이 전통적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것도, 세계 그 자체와는 유리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한 의지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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