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지와 오마주1) 그리고 우리에게 결여된 것
유경희
플로베르는 결코 소설을 쓰지 않았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플로베르는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을 연결할 뿐이었다고 한다. 즉 플로베르에게 있어 문장이란, 의미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이 다음 문장과 끊임없이 접촉하려고 하는 일종의 ‘에로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스가 가진 비극은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자가성애적(auto-eroticism)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자신과 사랑에 빠진다는 의미다. 그러니 그것은 근원적 나르시시즘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 전시는 인간 삶의 여정에 관한 메타포이자 포에지이다. 참여 작가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두 탄생과 죽음, 제의와 애도, 재생과 순환과 같은 인간 삶의 궤적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즉 삶충동(eros)과 죽음충동(thanatos) 혹은 현실원칙과 열반원칙의 양가성으로서의 삶의 순환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탄생이 죽음 사이에는 오직 반복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 반복이야말로 죽음을 지연시키는 에로스이다. 쾌락원칙 너머에는 죽음충동이 있고, 이 죽음을 지연시키려는 에로스(삶본능) 때문에 반복강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반복되고 있는 일이란, 결국 오브제아(objet a) 즉 환상대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삶의 동인으로 여기면서 지속적으로 대상을 바꾸어가며 헛짚는 것을 말한다. 이때 오브제아는 연인, 권력, 지식, 명예, 사랑, 예술, 여행 등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하는 환유적 대상들이다. 이 지루하고 피폐한 삶을 건너는 방법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환상을 창조하는 일이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나는 이 전시의 윤곽을 라캉식2)의 포에지로 재구성하였다. 이 글은 대부분 나의 낱눈이 아닌 라캉의 겹눈으로 접근했다. 적어도 나와 라캉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서로 시선과 응시를 주고받는 불륜적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라캉은 어쩌면 우리 동양인에게는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있는 의식과 사유를 먼 길을 돌아왔는지 모른다. 그가 마지막에 접한 사상은 노장사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라캉이 가엾고 기특하기도 하지만, 에둘러 난삽함으로 포장하는 그의 사유의 방식은 그 나름대로 죽음(해골)일 수밖에 없는 삶을 견디는 애달픈 방법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모든 예술가들의 작업이 번번이 그렇듯, 이번 전시의 작업들도 하나의 ‘화이트 노이즈’3)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자라날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작품이라는 뜻을 함의한다. 하나의 가능태 혹은 잠재태로서의 작품은 다른 작가에 오면 바로 연금술적으로 변모한다. 하나의 작품이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형태로 태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선험적인 동시에 지적인 필연성의 결과인 것이며, 이렇게 태어난 새로운 예술 형태는 현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심오한 문제들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파괴와 생성이 매우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즉 긴장된 평화와 고통스러운 조화, 숭고한 분신과의 난폭한 동일화가 무한히 부풀었다가 비워지고 생성했다가 소멸되곤 하는 것이다.
인간을 긍정적으로 변모시키는 예술이란 매번 새롭게 해석될 가능성을 제공한다. 나는 창조하지 않고 발견할 뿐이다. 창조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이 전시 혹은 작업들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마지막 타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에 내가 작가로서 실제로 마지막 과제를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어쨌든 지독하게 난감했을 것이고, 한편으론 묘한 쾌감이 있었을 것이다. 나로부터 시작한 작업은 작가의 순서를 뒤바꾸어 그것을 내 방식대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작가명을 굳이 호명하지 않더라도 이해할 것이지만, 애초의 것을 전제로 한다면 E(유경희)-B(김성배)-A(연기백)-C(김도희)-D(김학량)의 순서가 될 것이다. 이런 순서의 역동성이 필연적이지는 않다. 그러니 이런 순서가 조금 바뀐다 하더라도 그 전체적 윤곽이 함의하는 바가 흐려지지 않는다.
언제나 인간은 자신이 말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 무의식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을 읽어낼 수도 있고, 전혀 상관없는 화이트 노이즈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한계이고 실재계를 견디는 나름대로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단 하나 가능했던 일이라면, 지속적으로 타자들에게 에로스적 태도로 접근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나는 모든 타자들이고, 타자들은 나이다. 모든 편지는 도둑맞은 편지이고, 모든 편지는 나에게 쓰는 편지일 따름이니까 말이다. 감히 나는 타자들은 결국 나의 응시였다고 믿는다. 내 시선을 되돌려준 응시 말이다. 나의 이런 발상은 이번 전시가 마지막 주자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분명 누군가 다시 이 전시를 이어줄만한 개념을 들고 호쾌하게 이 부조리한 세태를 풍자하고 전복시킬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내가 한 일이라면, 바로 이 전시를 마무리 하는 게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순환고리의 두 번째 단계에 첫 신호를 알리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마지막 타자의 분신들과 만나러 간다.
E. 하나의 카오스-무의식
나는 먼지가 되어 바람과 함께 바다 속으로 흘러들었다. 얼마나,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어둠이 왔고, 또 날이 밝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깊이도 넓이도 알 수 없을 만큼 광활한 곳이다. 마치 태초의 이미지 같은...달은 적요하게 수면을 비춘다. 달은 태양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달은 그토록 투명하게 만삭이 된 배를 한 채 수평선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위에 올라타 달을 베개 삼아 누웠다.
어디선가 세이렌의 소리가 들린다. 세이렌은 늘 유혹의 노래를 부른다. 세이렌은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내 노래를 듣게 되면 너는 더 많은 것을 알고 행복하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4) 고향이라니? 나는 시뮬라크르-고향에서 이데아-고향으로 아주 돌아온 거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미혹된다. 그러나 유혹의 대상으로서의 몸, 돌아갈 몸이 아직 없다. 웬일인지 나는 다시 오딧세우스의 이타카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욱 흥미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딧세우스처럼 몸을 얻고 다시 한번 세상을 모험하고 싶었다. 그처럼 무사히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통과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한 세이렌이 내게 귀뜸해 주었다. 오딧세우스가 노랫소리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가 귀를 막고 몸을 묶어서가 아니었다고. 오딧세우스의 아름다운 눈길에 오히려 세이렌이 유혹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응시에 사로잡힌 영혼! 세이렌은 이 게임에서 철저히 패자가 되었다. 그렇더라도 이런 일이 아직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다.
본래 내가 있었던 장소란 어디인가? 그런 장소가 있기는 한가? 그렇게 니르바나(nirvana)의 자리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서도 나는 미열에 들떠 다시 생명을 얻고자 갈망한다. 아주 구체적인 근육을 가진, 타자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 나는 늘 이렇게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또 이곳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어떡하면 이 어둡고 깊고 혼돈스러운 이 원초적인 질료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또 얼마나 흘러왔는지 모른다. 얼마나 떠있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면서 억겁의 시간 혹은 단 몇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아니 그것은 시간이라는 척도로는 재단할 수 없는 세계였다. 나는 낮에는 수면 아래에서 긴 잠을 자다가 밤에만 깨어있다. 만월인 지금, 나는 음부를 벌려 달을 몸 속 깊숙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B. 하나의 탄생-코라5)
그때였다. 달을 보자 나는 오줌이 마려웠다. 나는 달빛과 함께 라멜르6)처럼 갑자기 자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갑자기 마른 하늘에 천둥 번개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것은 최초의 음성 혹은 일갈이었다. 인류 최초의 금기의 목소리? 어머니와 한 몸이 되면 너를 죽일 것이라는, 신 혹은 아버지의 명령의 소리? 인류 최대의 집단무의식이자 집단죄의식이 탄생되는 순간이다.
어느새 나는 도착했다. 마치 블랙홀 같은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뭔가 물컹하고 뜨뜻하고 낯설은 동시에 낯익은 유토피아! 어디에도 없는 장소, ‘코라’(Chora)이다! 에로스의 근원, 불가능한 대지모-어머니와의 합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다시 자궁으로 함몰해 들어갔다. 그것은 뜬금없고 자연스럽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좀 답답했지만, 이렇게만 있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고 느낄 때, 나는 갑자기 미약한 울음소리와 함께 요람에 던져졌다. 마치 모태로부터 잔인하게 내쳐진 존재 같았다. 나의 몸은 모체와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내 무의식은 모체와 끈끈하게 연결되어있다. 그런 내 모습은 여전히 낯익은 동시에 낯설다.
나는 마치 세계를 처음으로 쳐다보는 것 같이 어리둥절해 있었다. 나의 구애 받지 않은 시선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유아의 것이다. 전존재로 응시하는 눈길이다. 나의 시선은 모든 창조물 사이에 있다. 모든 창조는 간결한, 최대한의 간결한 표현방법을 추구한다. 간결성을 추구하는 것은 재생된 삶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까?
나는 생경한 내 모습을 잊고자 관심을 ‘대상’에게로 돌렸다. 대상-타자에게 욕망을 느꼈다. 나는 충족할 것을 꿈꾸며 이상적 타자를 향해 접근한다. 그러나 무의식에 자리 잡은 근원적 나르시시즘은 타자에게서 완벽히 충족될 수 없었다. 아무도 잃어버린 고향, 어머니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상을 찾는 여행을 포기할 수 없다. 그 감정은 사랑인 동시에 혐오요, 즐거움인 동시에 고통이다. 그래도 나는 계속 헛짚는 것에 기묘한 두려움과 동시에 쾌락을 느낀다. 이것은 내 삶의 동인, 환유(metonymy)다.
나는 머리가 좀 컸을 때, 그러한 환유의 한 방법으로 자주 짐을 꾸렸다. 그때 내가 택한 방법이 타임-슬립(time-slip) 즉 시간을 거스르며 미끄러지듯 방랑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온통 검은 나락을 동여매고 있곤 했다. 나는 자유롭고자 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온갖 종류의 망상이 마치 마그리트의 <거대한 나날들>처럼 억압된 무의식으로 들러붙어 있었다. 그것을 떼어내면, 다시 자라나고, 또 자라나고, 그렇게 떼어낸 곳에는 얼룩이나 오점 이상의 상흔(trauma)이 남아있었다. 나는 이제 그것을 더 이상 떼어내지 않을 것이다. 부정성과 같이 살기!
A. 하나의 삶-환상
신은 창조하며 논다. 나는 신의 창조를 흉내 내며 논다. 나는 코라에서의 어머니와의 합일을 포기하는 척하며, 신-아버지의 편에 서기로 했다. 나는 신-아버지를 닮아 원하는 것은 뭐든 잘 만들 수 있다. 지금 어머니는 영원히(?) 외출 중이다. 어머니의 부재가 환기하는 고독을 견디기 위해 내가 고안한 놀이가 있다. 대지미술 프로젝트!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부를지도 모르지! 그것은 포르타-게임7)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섬을 통째로 어루만지고 주무르기로 했다.
좀 큰 섬이 있고, 그 주변에 무수히 작은 점 같은 섬들이 떠있다. 기표들의 섬. 의미의 닻을 내리지 못한 섬들. 흐르는 섬의 기표들. 그들에 따라 기의들도 흐른다. 두 개의 흐름이 겹쳐질 때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불리워진다. 이런 상징계에서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야만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보다는 내가 낫지 않은가? 섬만들기 놀이, 이것은 고독 속에서 자신을 소멸시키는 나만의 방법이다. 지금으로선 섬만이 나를 외롭게 하고, 동시에 그 외로움을 견디게 해주는 존재다.
처음에 그 섬은 봄만 알뿐, 보여 진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섬을 어루만지고 지긋이 앉아 시선을 보내자, 그것들은 나에게 응시를 던졌다. 나뿐이 아니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자, 이름을 불러주는 자, 그저 바라만 보는 자에게도 응시를 보내주었다. 아차! 그런데 어떤 방향에서 보면, 그것은 언뜻 해골 같아 보였다. 갑자기 황망해지고 두려움이 급격하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종의 상징적 죽음을 맛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환상 속에서만 그 섬은 베일을 쓴 아름다운 여자 같았다. 그것은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동인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그것의 실체가 해골임을 처연히 깨닫게 되는 순간일지라도, 나는 “당신은 여전히 나의 팔루스야”라고 애써 부정할 것이다. 그래서 베일을 쓴 오브제에 접근하는 동안만을 즐길 것이다. 그것이 꿈꾸며 환상을 가로지르는 일이다. 나는 생각한다. 삶이 환상보다 더 환상적이라고, 그보다 더 강력하다고 혼잣말을 되뇌이면서, 나는 섬을 직조한다. 섬은 환상이고, 섬만들기는 환상을 가로지르는 나만의 주사위놀이다.
C. 하나의 죽음-주이상스
“아버지! 내 몸이 타고 있는 것이 안보이세요?”
타자를 창조(혹은 파괴)하려면, 나는 열광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어제도 불안한 꿈을 꾸었다. 오늘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상상적 타살이자 상징적 자살! 이번처럼 힘들고, 이번처럼 간단한 일은 처음이다. 꿈 속에서 나는 이 장면을 실험했다. 매번 이 장면은 실패로 끝난다. 마치 타르코프스키가 <희생>에서 집을 불사르는 장면을 두 번 찍어야 했듯이 나한테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쩌지? 얼마나 지난한 일이었던가? 카메라의 미작동으로 찍혀지지 않은 불타는 집의 이미지를 다시 담기 위해, 새로 집을 정성들여 지어야만 했던, 오! 가엾은 타르코프스키여!
나는 더욱 강렬하게 이 작업을 완성(혹은 포기)시켜야할 필요를 느꼈다. 나의 행위는 어떤 신플라톤 주의적 초월적 입장이나 현실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예술인의 히스테릭한 증상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가기 위해 숨결을 불어 넣는다. 숨결을 불어넣는 것은 기체로 사라짐과 동시에 고체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내 행위는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행위8)와 다르지 않다. 산화-화장은 모든 이기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 관계에 대한 전면적인 포기를 전제로 한다.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을 통한 구원을 강조했지만, 나는 공존을 위한 파괴, 파괴를 통한 공존을 얘기한다. 나는 너를 통해 세상 모든 탐욕과 이기주의를 소멸한다. 물질세계와 물질세계의 법칙과 굴레를 벗어나고자 한다.
이미지는 대상의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상실을 전제로 한다. 애도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정의된다면, 그것은 외상의 일종이다. 따라서 표상에 의한 최초의 구조적인 상실과 애도는 원초적 외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만큼 원초적인 외상은 없다. 죽음에의 유혹, 그것은 실재계의 귀환이다. 죽음이란 언제나 나의 몫이다. 죽음에의 의지는 반복을 통해 우리 삶에 나타난다. 나는 그런 금기의 몫과 자주 맞닥뜨린다. 현존재란 언제나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죽음은 이미 삶속에 있다. 우리는 매일 상징적으로 죽는 것이며, 상상적으로 타인을 죽이고 있다. 나는 미리 죽음으로 달려가면서 좀 자유로워졌다. 이것이야말로 우연히 들이닥치는 여러 가능성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의 공포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아무리 그것을 부정해보았자, 나 역시 그것이 좀 낯설고 두렵다. 죽음은 영원한 언캐니(uncanny)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또 얼마나 매혹적인가? 화장-화엄의 사건은 분명 주이상스(Jouissance)다. 잉여에로스다. 너무나 과도한 엑스터시를 법열 혹은 주이상스라고 부른다. 고통 속의 쾌락이다. 너무 과도한 쾌락이 다가오면 우리는 ‘작은 죽음’을 맛본다. 그러니 우리는 매번 죽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야 그에게 도달한다.
D. 하나의 애도-네크로필리아
그녀(연인-죽음-시체)가 내게로 왔다. 그녀는 고약할뿐더러 공포스럽다. 나에게 늘 죽음만을 맛보게 했던 여자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나는 그녀를 소유할 수 없었다. 그녀는 늘 옆에 있었고, 늘 자기와 함께 놀아달라고 속삭였지만, 나는 그녀에게 시간을 좀 달라고 늘 애원하곤 했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나는 그녀를 늘 숙명적으로 비밀스러운 것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녀를 지속적으로 낯설은 타자로서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나로 환원될 수 없고 늘 낯선 자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타성을 파괴하고, 그녀를 소유하는데 성공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녀의 이타성, 그녀의 낯설음이 계속 상처를 주는 한에서만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늘 곁에 있었지만, 그녀에게 가는 길은 늘 험난했다. 나는 현실에서 그녀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나의 소망은 그녀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망각하는 것이었다. 망각 혹은 단념? 그렇게 그녀를 소유하지 않는 것이 그녀를 영원히 갖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얻으려고 소망하고자 하는 반면, 그녀를 단념하고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소망이 더 컸다면? 정말 그럴까? 혹시 거세공포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녀가 왔고, 우리는 몸이 없이도 충분히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그녀 옆에 몸을 뉘여 잠시 제사처럼 정사를 행한다. ‘이미지’와 ‘죽음’은 한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있다. 그렇지, 내겐 언제나 오브제아였던 그녀가 해골(죽음)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나의 환상대상이자 이미지로 나타난 죽음이었다. 처음엔 베일을 벗은 그녀는 낯설고 두려웠다. 가만 보니 그것은 나의 거울이었다. 나의 나르시소스, 나의 분신, 나의 도플갱어, 나의 유령이여! 죽은 시체를 부여잡고 있는 나는 네크로필리아, 시체애호가이다. 죽은 시체를 부여잡고 소풍을 가고 대화를 나누고 정사를 하고 여행을 떠난다. 모든 최초는 모든 최후가 되었다. 이처럼 내가 궁극적으로 진정으로 그녀를 얻는 순간은 그녀를 잃을 때뿐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실재계와의 두려운, 그러나 행복한 만남이었다. 나는 그녀(나)를 애도한다. 내가 애도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삶은 순환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이제는 그녀를 보낼 때이다. 이런 상실과 애도는 나에게 가볍게 삶을 연장하도록 해준다. 애도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9)
유경희(미술비평/PH.D.)
1) 포에지(poesie)란 문학의 한 장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포에지란 하나의 세계관이며 현실과 맺는 하나의 특수한 형식이다. 이렇게 볼 때, 포에지란 한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하여 동반하는 하나의 철학이 될 것이다. 이 전시는 인간의 거대한 생애를 하나의 포에지로 나타낸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쓰고 있는 이런 따위의 글은 포에지가 되지 못한다면 오마주라도 될 것이라는 노파심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다.
2)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개념은 근대의 실존적 자아와 현상학적 자아를 전복하고 해체한다. 근본적으로 오인의 구조 즉 거울단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분열될 수밖에 없는 자아, 라캉은 자아(주체)를 결핍으로 보고, 타자의식을 끌어들인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은유와 환유)되어있다” 등 라캉의 고유한 아포리즘과 그 속의 시선과 응시, 오브제아, 주이상스, 죽음충동 등의 개념은 우리 인간 삶의 해독되지 않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3) 카프카의 소설<여가수 조세피네, 혹은 쥐의 일족>에서 ‘개’라는 종족은 음악성을 타고 났지만, 쥐들의 종족은 음악이라는 단어조차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세피네라는 쥐는 자신을 여가수라 칭하며 노래를 들려주는데, 쥐들이 듣기에는 그것은 단순히 자신들이 내는 찍찍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왜 음악이라고 예술이라고 확고하게 믿는 것일까? 조세피네가 부르는 노래, 그리고 개들이 부르는 노래는 들리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수화기 속 멀리에서 들려오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소리처럼 소리라고 이해될 수 없는 소리, 소리 이전의 소리, 사람의 말이 들어있지 않은 어떤 소리, 들려오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소리인 것은 아닐까? 바로 침묵과 소리의 근원지에서 나오는 ‘그것’처럼 말이다.
4) 세이렌의 노래는 천상 혹은 자연의 노래이다. 그래서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이라면 이성을 잃고 자연으로 뛰어들고픈 욕구를 느끼게 된다. 이에 세이렌은 다시한번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내 노래를 들으면 너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여기서의 고향이라는 단어는 신화적 존재이면서, 자연 그 자체인 사이렌이 말하는 고향은 오디세우스가 생각하는 고향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오디세우스가 생각하는 고향은 아내와 자식이 있는 집과 자신 땅과 사유재산이 있는 안정되고 여유로운 곳이다. 한 마디로 인간이 지향하는 이성적인, 더 나아가 물질적인 곳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이렌이 데려다 주겠다는 대지의 자연, 낙원의 자연에 오디세우스의 몸을 묶는 것이다, 그곳은 갈 수 없는 곳, 그리고 꼭 가고 싶지는 않는 곳이라는 것이다. 반면 사이렌의 노래는 지상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귀를 열어놓는 것이다.
5) 코라는 타자를 품은 어머니의 신체, 곧 이물질을 담은 큰타자로서, 사랑과 고통을 의미하는 무의식의 그릇으로서의 여성신체를 의미한다. 코라는 플라톤이 최초로 어머니에 비유하며 지칭하였고, 후에 데리다가 코라를 아버지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어머니의 성이 아닌, 선/악, 기표/기의와 같은 한쌍의 대립을 가능케하며, 모든 흔적을 다 받아들이는 자궁, 허공과 같은 것으로 정의하였다.
6) 라멜르는 아직 성이 분화되기 이전 상태의 생명체를 가리킨다. 라멜르는 알의 메타포를 말하는데, 이는 플라톤의 『심포지엄』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 기반을 둔다. 인간은 원래 남녀 양성이 한 몸 안에 깃들여 있는 일종의 구체 모양의 생명체였는데, 후에 이것이 둘로 쪼개져 오늘날과 같은 남녀 두 성이 탄생한 것이다. 이 신화의 요지는 성적 욕망, 즉 에로스란 잃어버린 나머지 반쪽과 결합해서 상실된 전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경향을 본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캉은 이 구체 모양의 생명체를 자궁 속의 태아로 이해한다. 따라서 라멜르는 아메바처럼 움직이며 그것은 불멸하고 생존하며 분열작용을 통해 지속한다. 라멜르의 그 파편성으로 인해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의 모형과 유사하다. 이 라멜르의 분열된 조각들이 기관(성감대)들을 중심으로 고착된 것이 부분충동이다(서동욱, “라캉과 들뢰즈-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와 라캉의 부분충동:스피노자적 욕망이론의 라캉해석”, <라캉의 재탄생>, 435-438)
7) 프로이트는 자기의 손주를 관찰하던 중 발견한 놀이에 "포르트-다(fort-da)"라는 이름을 붙였다. 혼자서 실패를 만지작 거리며 놀던 아가가, 실패를 멀리 던지고는 "포르트"라고 외치고, 다시 잡아당겨 손에 잡고는 "다"라고 외치는 놀이를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패는 아가에게 엄마의 상징물이다. "포르트"는 "엄마가 없어졌다"의 뜻이다. 사실 아가에게 엄마가 사라지는 일은 "슬프다"고 표현할 정도의 감정적인 상황이 아니라, 아가의 생존이 걸린 지극히 근본적인 위협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 상황이다. 그러다가 "다" 하면 엄마가 다시 돌아왔으니, 이것도 "기쁘다" 정도가 아니라 "살았다!" 그 이상의 감동과 안도감을 주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가는 왜 자꾸만 그 무서운 상황, 즉 실패-엄마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인가가 프로이트의 연구과제였다. 아가는 스스로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는 공포상황을 놀이로 상징화해 반복한다는 것이다. "포르트-다"는 공포를 미리 연습하여, 그 순간의 충격을 완화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보호기제이다. 나아가 아가는 실패, 즉 엄마를 손에 쥐고 있으니, 엄마가 없더라도 다시 끌어당기면 나타난다는 통제의 능력을 놀이로나마 갖고 있는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다.
8) A.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에서 은퇴한 대학교수 알렉산더는 생일 오후 막내아들과 함께 죽은 나무 한 그루를 바닷가에 심는다. 그는 아들에게 먼 옛날 언덕 위의 죽은 나무에 3년간 매일 물을 주어 마침내 그 나무에서 꽃을 피우게 한 수도승과 제자의 일화를 들려준다.
9) 실재계의 핵은 죽음이다. 애도가 끝난 후 리비도는 다시 대상을 향한다. 만물을 움직이는 텅 빈 공간이 도라면, 실재계는 본래의 도이며 삶 속에 들어와 만물을 순환시키는 무의이다. 무위는 죽음이 곧 삶의 동인이고 해골이 남근의 이면인 것을 알고 음양의 양면을 공존하게 하는 윤리이다. 해골임을 알기에 남근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무위이고 라캉식 환상을 가로지르기이다. 나는 이 드러낼 뿐 포착되지 않는 세계에 대해 불가능을 느낀다. 그것은 만물을 존재케 하지만 아무 것에도 없는 도와 같다.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