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 by Dohee Kim

실패를 위한 전시<Coding conversation>에 대하여

 

 

김도희<Coding Conversation>기획자

 

 

 

 

한 시대의 정신성을 증명하는 것은 예술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미술계는 커머셜리즘만 판칠 뿐 정신을 리드하는 움직임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신을 리드해주시기 바랍니다.

 

푸른 지중해가 보이는 알제리아의 해안, 로마의 유적이 폐허로 많이 남아 있는 곳에서 태어난 알베르 카뮈는 말했습니다. ‘예술은 폐허 위에 맺힌 이슬’이라고...... 예술은 오늘의 이슬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대의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아방가르드가 되어야 합니다.

아방가르드에 연령은 없습니다. 

예술은 ‘포에지(Poesie)’가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통하면 떨어져 있어도 같이 있는 겁니다.......1)

 

 

1. 

  산더미 같은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고 또 '주류'와 '비주류'로 분류되어왔지만 '정체'를 묻는 것은 그저 반골기질이 농후한 이의  편협한 트집쯤으로 치부될 만큼 우리의 시대는 '과잉' 그 자체에 함몰된 것 같다. 이미지를 둘러싼 거품은 스타일적으로 유사한 형식에 요상한 신조어를 붙이는 등의 ‘비판적 보기’가 빠진 유사담론이다. 이른바 세간의 '이미지 메이킹' 역할을 빼면 이것이 봉사하는 곳이 미술이 아님은 자명해 보인다. 소비상업주의와 미술이 적극적으로 교배하고 무엇을 한들 취향으로 소비되거나 트랜드에 격침되어 버리는 이와 같은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하고 전시하는 것이 예술가가 해온 일이고 또 우리가 하는 일이겠지만, 현상에 대한 회의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전체 환경에 있어서 유익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번에 최소한... 스타일로써의 형식을 남기지 않는 전시, 스타일로 소비할 수 없는 전시를 해야만 했다. 뒤샹의 ‘샘’이 가지는  예술적 가치는 ‘소변기’ 라는 제품에 있는 것이 아닌 기성작품을 조롱하며 예술의 가치와 역할을 새로이 묻는 정신에 있듯...내가 아는 한 예술은 '물신화'와 정확히 역행하는 과정에서 가치를 담보해간 것이었고 '스타일'에 대한 전복으로 당대의 '정신성'을 견인해 왔다. 그러니 감상의 핵심은 작품이라는 물질에서 정신을 조우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번 전시에서의 모든 형식은 이를 목적으로 숙고된 것이니만큼  그 방법 또한 선명했다.

 

  일찍이 곰브리치는 그의 책에서 ‘사실상 미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5) 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미술의 실체가 형식이나 물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의심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 온 미술가들의 정신과 태도, 그리고 실천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여기서 ‘미술’이라는 단어는 실체를 둔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미술에서의 코드란 일관된 논리를 통해 해독되는 암호화 과정과는 다른 것으로 작가의 작품이 기존 예술과 대응 국면을 만들어내고 있는 방법론을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이 ‘Conversation’에 비견될 수 있는 동사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았다. 이번 전시 <Coding conversation>은 이와 같이 동사로서의 미술을 재현하기 위해 텍스트를 열어젖히고 미술가들의 대응방식과 창작 과정을 부각한다. 여기서 목적론적 내러티브가 비워 둔 진실의 여백은 작가들의 긴장감이나 도전의식과 같은 살아 있는 현장적 에너지가 채울 것이다.


  전시 역시 감상을 다루는 예술활동이므로 형식의 변화 없이는 아무리 혁신적인 작품을 관객에게 들이밀어 봐야 새로운 감상의 층위를 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백남준이 그의 전시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전시장 입구에 매달게 된 것도 낯설음과 충격을 통해 그의 작품에 대한 경험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지 그 자체로는 별 목적이 없었다. 이미 정돈된 담론을 친절히 설명해 주는 전시에 걸맞은 방법이 있을 것이고 이처럼 관람자를 경악하게 하거나 또는 외롭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작품에 가까이 가도록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두고 불쾌하지만 친절하다고 할 수도 있을테지만 이러한 친절은 결국은 예술 자체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나는 예술 작품이 불특정 다수의 모든 감상자를 배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망막에 맺힌 상을 자신의 기억에 찰나적으로 비춰보고 가치의 있음과 없음을 취향적으로 판단하는 감상자집단은 엄밀히 말해 현재까지도 예술을 탈주시켜 온 재료이자 타겟이 되어 왔을 뿐이다. 2) 오히려 역사는 예술이 스스로를 위한 것일수록 그 파장이 길고 선명한 것임을 증명한다.  이번 전시에서 전시장에 놓인 작업 흔적의 기억을 들추고 추적을 돕고자 마련된 기록물과, 또 인쇄매체의 한계를 매우기 위해 작업 형식으로 아카이브를 설치했지만 이 역시 최소한의 운신이라도 해 볼 의지가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이번 전시는 예술을 고민하고 예술을 실천하는 이들과 예술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일지 모른다.

 

 

2. 

  '선행된 전시의 결과물은 이어질 작업의 재료가 됩니다. 즉 모든 작가는 선행된 작가의 작업을 자신의 어법으로 교체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의 훼손과 수정은 등, 방식은 어떤 것이든 무방합니다. 자신의 어법적 차이를 선명히 하고 수월한 작업을 위해 작가들은 여타 참여 작가들 작업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그리고 이후 각자의 작업 보고서를 제출해 주셔야 합니다.'3)     

 

 

  전시가 시작되기 약 오개월 전, 몇몇 사람들에게 위의 내용 등등이 포함된 메세지가 전달되었다. 그리고 연기백, 김성배, 김도희, 김학량. 4명의 작가, 그리고 권이중, 유경희. 두 명의 필진이 기획에 공감, 초대에 승락하였다.  주된 이유는 ‘낯선 경험과 실험’이 가능한 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서로간의 적극적 소통’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였다. ‘개인전 위주의 전시가 대접받는 현 미술계 풍토에 대한 반란’도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4)'소통'과 '실험'이라는 단어가 대부분의 전시에서 확인되는 지금과 같은 때의 이유치고는 참 별나다.

 

  곧 온라인 카페를 개설했고 2회의 오프라인 회의를 가졌다. 이것은 각자의 작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채널(작업자료교환, 인터뷰 등의 질의응답)과 전시 전반에 대한 의견교환(아카이브설치, 전시순서 결정, 전시방법의논), 그리고 일정을 확인(스케쥴 조정)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작업 순서는 작가들 간 어법적 차이를 최대한 부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따져서 전체적으로 리드미컬한 호흡이 연결 될 수 있도록 임의로 정한 후,  이것을 카페에 게시 하고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최종 결정했다. 그만큼 이번 전시는 유사성 보다는 차이성이 드러나도록 구성되었고  같은 맥락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논리적으로 밝힐 후속담론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두 필진의 글은 전체적 내용을 충실히 하기 위해 촛점을 명확히 하는 사전 협의를 거쳤다. 권이중씨은 전시전반의 내용을 작가의 기존 작업 맥락과 교차하여 구체화 하는 글을, 그리고 유경희씨는 인문학적 관점에서의 글을 담당했다. 

 

  이번 전시는 그 출발에서부터 모든 참가인들에게 있어서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해 정돈되고 준비된 결과 이상, 각자에게 필연적 도전이 되어야 했다. '과정'이 반드시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부실하거나 장식적인 과정이 결코 최선의 결과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잠재적 내용의 두께로 남는 것은 가시적 결과 보다는 과정에서 올 때가 많다는 것이다. 나는 경험에서 현장에서의 소통의지박약이나 내용에 대한 적당선에서의 타협이 전시장에서 사진 속 삼류배우의 어색한 표정처럼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는 것을 확인해 왔다. 예술이 단순한 개념적 유희이거나 입방정이 아니라면 이에 대한 '소통', '이해', '열정', '정신'은 그것이 펼쳐지는 장, 즉 우리의 삶에서 실행되는 것어야 한다.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목격하거나 경험하는 것을 통해 공감되고 또 파생되는 의미인 것이다. 본 전시는 각자에게 적극적 소통과 성실을 요구하는 일련의 시스템을 사용한 바, 모든 작가는 자신의 작업 방향을 준비하기에 앞서 자신의 작업 기간과는 별도로 전시장에 나와  눈으로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소통해야 했다. 나는 이것이 과정적이고 자체적 의미를 넘어 차별화된 결과로 가시화 될 것이라고 기대했었고 지금 이러한 심증이 정확했음을 결과로 확인한다. 

  한편 준비된 개념을 위해 조직된 전시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획자의 강력한 권력과 의도는 작가들의 작업세계를 파편화하기도 한다. 특히 검증과정이 부재할 경우 이러한 권력은 악화를 구축하는 양상으로 전이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위험하다. 무엇을 현대적 가치로 볼 것인가에 대한 가치기준이나 관점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현실의 시류나 트랜드를 스타일적으로 반영하는 취향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합목적적 방식으로 구축되는 서구 전시방식의 스타일을 현재와 같이 무비판적으로 모방하자니 정체불명의 작업을 마치 고정된 미술의 실체처럼 착각케 하는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결국 이 둘이 조화를 이루며 장기적으로 미술의 물신화 현상에 기여해 왔을 것이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감히 실패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실패는 예술가의 세계요, 실패로부터 움츠리는 것은 유기이다.”6)

 

 

  작가들의 긴 작업 과정에 있어서 작품이란 굉장히 임의적 성격을 띤다. 세잔에게는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며 절망을 되새김한 실패의 흔적이었고 고흐에게는 겨우 팔린 그림의 몇 푼까지 거지에게 준들 아깝지 않은 것이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게도 그 자체는 품에 끼고 자랑할 만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난 후에는 민망한 것이 될 때가 허다하다. 공적인 책임에 의해 작업들을 보관하지만 작업은 ‘그 때’의 문제의식을 물질로 드러내어 타자화 해 보는 매개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임의성은 거꾸로 작가에게 있어서 치열한 극복의 의지를 반증하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개인의 역사이지만 전체 예술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 내부의 작업과정은 이러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모든 작업은 부정과 파괴를 위한 준비이고 다음 작업을 심화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놓여 있다는 점에서 <Coding conversation>의 형식은 반복의 방법으로 실패를 극화시키는 플롯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알다시피 현실은 단어와 사물의 추상적인 관계 위에 세워진 언어로 담을 수 없다. 예술가는 늘 진실을 재현하기에는 부족한 언어로 작업하기를 견디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질서 정연하지도 완결 지을 수도 없지 않은가. 서구의 미학적 의식은 이를 논리화 하는 과정에서 합목적적 방법을 유능히 사용했지만 현재 이것의 반대급부에서는 정작 무질서하고 주름진 실재(삶)와 는 괴리된 추상적 개념에 갇혀버리는 문제에 봉착했다.

 

  연기백을 반영하여 장시간 손때가 묻은 구겨진 신문지 더미를 만난 김성배는 여기서 히말라야를 연상했다. 그리고 이것은 김성배의 몸짓에 의해, 김성배의 신체에 의해 부딪히고 뭉쳐져 설인이 되어야 했다. 또 다시 김도희가 투영되며 소각 후 재만 남았고 이렇게 남겨진 재는 다시 김학량의 문사적 놀이거리로 변모하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여운을 남겼다. 

한 작가에 의해 제시된 가설은 다른 작가의 부정과 선언을 통해 교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에서 사색과 사고의 결과는 매번 공중에 내던져진 돌처럼 우연한 안착을 통해 무효화 되었고 이는 전시 전체의 일관된 내러티브, 즉 일관된 해석의 적용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암담하게도 이러한 여러 번의 변화가 우리의 눈앞에 남긴 것은 그 흔적일 뿐이며 대상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의 방법이 '교체' 사이에 이용된 것이 중요하다. 의미의 집적으로써가 아니라 선행된 의미를 자신의 방법으로 소거하고 처리 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단 김학량의 ‘최초의...’ 작업들만이 아니라 다른 만남에서 대상은 무조건 최초가 될 수밖에 없었고... 하여 여운이 남을 수 밖에 없으며 영원히 끝날 수도 없다. 이것이 내가 전시 초대장의 11항에서 “본 전시는 타자의 반복이자 나의 반복이며 끝없이 교체되는 진리의 가설과 불연속적 의미를 보여줄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게임이므로 목적론적 지도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한 연유이다.

  이렇게 전시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대상과 작가 간의 관계는 완벽히 질서 정연할 수 없는 혼란과 충돌의 변수를 내포하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현실에서 영향을 끼치는 방법과 여부에 따라 실재를 무수한 가변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인식론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어쩌면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행해진 초현실주의자들의 시도가 이번 전시와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이러한 인식론의 차이에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7)

 

  이번 전시를 개념적으로 보자면 실패와 부정의 반복된 과정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삶의 장에서 체험할 때 그리 가볍거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지프의 반복행위가 추상적으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이유이고 우리가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내를 보며 극심한 권태를 온몸으로 공감하는 이유인 것이다. 뒤샹 또한 까반느와의 대화에서 이러한 개념적 토톨로지를 실재의 블랙커피에 대한 경험과 비교하며 언급한 바 있다.8)

나는 고정된 의미를 무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이를 생생한 실재(리얼리티)로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을 실험했던 것이다.

 

3.

  나는 현대미술의 이슈로 떠오르는 작업들 모두에서 공감을 느끼지는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감이란 논리적 이해를 넘어선 것이다. 그 이유를 그들의 현대성과 나의 현대성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기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점이 매우 불편하다. 때문에 서구의 것으로 충족될 수 없는 현대성을 반드시 우리의 전략으로 접근해 나가 그것이 다시금 대응적 가치의 생산이 되는 일을 만드는 것이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번 전시에서처럼 미술의 코드화 과정에 집중, 반복을 통해 형식의 임의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빠르고 복잡한 영향관계 속에서 형식의 ‘차이’는 ‘유사성’보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식에 스민 작가들의 문제의식과 반응점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 관점과 방법을 더 넓고 싶게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전시방법과 비평전략에서도 유사형식주의자와 아류들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작업 현장에 그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는 그 구체적 내용의 생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는 일관된 의미해석의 관성에 크게 지배받는 감상자에게는 곤혹스러울지도 모른다. 전시를 읽기 위해 대상을 향한 전제를 계속 수정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을 현재까지 연명시킨 양분은 가장 옳은 형식을 창조한 전지전능이 아니라 회의와 부정, 파괴를 감행하는 해체의지이자 무지에 대한 스스로의 고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나는 이번 전시가 땀 섞인 어조와 고민을 흘려보내고 형식에서 죽은 단어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현장에서의 긴장감, 소통에의 의지, 그리고 도전을 재현한 것이길 기대했다. 하여 그 스타일의 소비가 아니라 정신을 공유하는 데에 작은 기여를 했기 바란다.

 

 

4.  그리고 남은 말

 

  완벽한 형식을 준비할 수 없다는 점. 스스로의 내공만으로 우연한 상황을 담당해야 하는 점은 작가에게 큰 부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흔쾌히 초대에 수락해 주신 여러분이 계셔서 전시가 가능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작업 기간 동안 거의 매일 나오는 수고를 싫은 내색 없이 해 주셨고 서로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먼저 몸을 낮추고 마음을 열어주신 것 등, 만남부터 전시가 마무리 되는 지금까지 여러 선배께서는 아직 성미 급하고 속 좁은 제게 어디서도 배우기 힘든 귀감이 되셨습니다.

 연기백, 김성배, 김학량작가님. 권이중, 유경희 필진님. 그리고 어렵게 부탁드리지 않고도 귀한 관심과 감상기까지 자발적으로 주신 도병훈, 조규현님. 마지막으로 인내심 있게 복잡한 과정을 꼼꼼히 챙겨주신 김의자님 감사합니다.

 

 

1) 김병기 선생님 도미 송별회 소감말씀 중- 「김병기 선생 도미 송별연 소감」 ,도병훈, 2006. 06. 02, ICAS forum

 

 

2) 일상적 예술을 주장하는 활동 중 대부분은 일상적 인간의 일상적 욕망을 합리화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상적 욕망이란 현재와 같이 무한 속도와 이미지와 정보에 의해 조작되고 조절된 것으로 인간 스스로에 의해 직시될 틈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예술은 도구화된 욕망을 직시하는 것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이를 유지하고 합리화 하는 것이 되어야 할까? 일상적 인간에게서는 일상품밖에 나올 수 없고 이는 단순한 일상적 현상의 반영일 뿐이지만 많은 경우 이러한 일상적 이미지만으로 ‘현대성’을 담보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의 물신일 뿐 현대미술은 아니다.

 

 

3) 2009년 4월 작가들에게 보낸 이메일 중

 

 

4)“많은 부분 예상하고 완벽히 준비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고 작가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이번전시를 수락하게 된 개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들의 대답에서 발췌

 

 

5)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서론에서

 

 

6) <몰로이> 사무엘 베케트지음, 김경의 옮김, 문학과지성사, 사무엘 베케트와 조르주 뒤튀이와의 대화 재인용, p.274

 

 

7) 초현실주의자들은 피라미드형의 그림을 아래로부터 완성시켜가는 공동 작업을 한 바 있다. 이는 공동 작업을 통해 전체를 완성시켜 간다는 점에서는 이번 전시와 유사하지만 이미 완결이 정해져 있다는 것(삼각형의 형식)과 개인의 작업 결과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교체보다는 집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정도의 차이일 뿐 개념적 요소에 대한 미시화를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태도는 여전하다.

 

 

8) “빈의 논리학자들이 한 체계를 구상했는데, 내가 아는 한 그것은 모두 동어반복(tautology), 즉 전제가 반복되는 체계였다. 수학에서 그것은 매우 단순한 정리(定理)에서 아주 복잡한 정리로 이어지지만 그러나 첫번째 정리 속에 모든 것이 있다.; 그래서 형이상학이나 종교가 모두 동어반복이다.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블랙커피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감각의 조절이 있기 때문이다.

 두 눈은 블랙커피를 본다. 거기에는 감각의 검열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은 언제나 동어반복이다.

 

「마르셀 뒤샹-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 피에르 카반느 엮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정병관 옮김, p.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