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 by Dohee Kim

김도희 첫 개인전 <미친 나무> ‘마비된 곳을 찌르다’- 껍질을 벗겨내다.

 

 

 

<Self Bomb>은 수를 문자로 적어 넣은 종이 띠를 얼굴이 감고 그것을 흐트러뜨리는 상황을 3장의 사진기록으로 남긴 작업으로 언어 체계들에 갇힌 뇌와 감각기관을 외부와 차단하여 폐쇄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갑갑함을 갖게 한다. <Nothing>은 이와 반대로 캔버스를 회화적 규범 또는 예술성을 조소하듯 테이프의 접착면을 바같으로 향하게 하여 머리카락, 먼지 등이 그냥 두도록 방치하였다. 두 작업 모두 그것을 속박하는 규범을 거부하지만, <Self Bomb>이 와부와의 차단으로 그것을 행하고 있다면, <Nothing>은 외부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쓰고 있다.

 

<Nothing>이 그리는 방법을 쓰지 ㅇ낳고, 즉 캔버스에 작가 자신이 그린 이미지를 배제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음으로 해서 회화적인 이미지를 캔버스에서 남기지 않고 그것을 사물로 제시하고 있다면, <손톱산수>는 그 이미지를 망막에서 벗겨내려 하고 있다. <손톱산수>는 겸재의 <만폭동도>의 이미지와 비슷하지만, 그 화면에 가까이 갈수록 산과 폭포는 흩어지면서 표면의 거친 선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 순간 망막에 의존하여 하나의 상에 안주하고자 하는 기대는 사포 위를 날카롭게 파고 지나간 흔적들로 인해 꺾이게 되고, 화면 앞에서 서늘한 소름을 돋게 한다.

<손톱산수>에서 겸재의 <만폭동도>와 유사해 보이는 외관(형상)은 ‘유사한 것’과 ‘같은 것’의 차이를 극명히 드러내는 창치이다. 그러므로 손톱으로 사포를 긁는 행위의 신경질적인 반응, 공격성으로 인해 심리적인 자극을 주는데, 작가는 이 심리적 자극을 이용하여 통념적 인식과 경직된 태도를 공격하고 있다.

 

중앙벽면의 한가운데 걸려있는 한 장의 장지는 작가가 한 달 동안 외부로부터 공급받는 호르몬제를 끊고 당시의 고통의 경험을 흔적으로만 남게 하고 있다. 이 찢기고 긁혀 너덜거리는 장지 한 장을 작가는 고통의 표상물로 놓아두었는가? 그러나 이 장지에 가해진 흔적이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또 이 찢기고 긁힌 흔적이 실제 고통의 반응으로 인해 생겨는 것이라는 점에서 표상화의 의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신치로이드60>에서 작가가 한 때의 고통의 경험과 반응의 흔적을 분리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그 거리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고통을 직접 보여준 다고 하여도 ‘나와 너’ 그리고 그 당시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기억의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거리를 좁히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멀리 떨어뜨리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 거리의 확인이 다른 것들로의 채워짐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현대미술이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람자의 수직적인 구조를 수평적일 수 있게 마련해왔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무엇을 채워나갈 수 있는 가의 문제일 것이다. 수직과 수평의 구조는 제도적인 틀로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향하는가 외면하는가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나의 무엇이 그의 무엇을 향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작업에서 나는 그런 문제들의 문제를 읽게 되고, 그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묻는 것으로 보았다.

 

김도희는 작업의 방법을-“고통에 둔해질 정도로 만성화된 상처에 소금을 약간 뿌리면 상처가 타는듯한 고통을 받는 것에 비유 하고 있다. 작가는 심리적인 자극을 주는 장치들과 가치와 관념이 깔려 있는 대상을 조합하여 미술안의 규범과 통념에 얽매여서 정작 그들 자신에게도 둔감해진 관념과 감성을 향하도록 하고 있고, 이 충돌이 불편함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 미술의 규범을 설정하고 있는 관념과 태도로 인해 문제를 발생시키게 된다.(물론 작가는 미술의 규범을 활용하면서 그 경계를 문제시하고 있다고 보인다.)그려진 것과 비슷하면 회화적 관념으로 보게 되고, 산수가 눈앞에 보이면 자연에 대한 관념과 감상적인 태도로 보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이 작가의 작업이나 글에서 그녀가 둔감해진 관념과 감성을 상처의 징후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은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오늘날의 인간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 상처는 마음의 문제인데,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작업에서 보이는 날카로움을 몸을 굳게 만드는 틀을 향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러나 아픔 없이는 그 어떤 변화도 없다. 작업에서 보이는 작가의 태도로 <신치로이드 60>에서 거리를 떨어뜨리는 공백 간에 무엇이 놓일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며, 이 작가가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 자신이 체험에서 출발하고자 하는 것도 그녀의 작업이 무뎌진 감성, 즉 외부의 강함 에너지가 몸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것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작가는 <손톱산수>에 진경이란 무엇인가. 실재란 무엇인가의 물음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작업은 색다르게? 그려진 산수화의 모습을 현상의 가장 표면에 내어놓고 그 거리가 좁혀지면서 또 다른 질서가 있는 모습을 펼쳐놓았다. 꽉 짜인 얼개들을 조금 벌려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것이다. 그것을 마찬가지로 또 다른 표면이지만, 가까이 가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곳이며 그 흩어진 질서 안에서 이제 망막에는 드리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손톱의 울림이 외치는 그 곳, 그것이 어디서 들리고 있는가는 관람자의 몫인 것이다.

 

비디오 작업인 <Neither-더 진실한 모습을 재현하는 데에 따른 어려움>에는 눈꺼풀을 열고 있는 손으로 눈에 자극을 중도, 또 동공을 보이는 카메라가 자극을 부어도 외부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눈을 보여준다. 뇌가 깊은 잠 속에 빠져들 때, 눈도 외부를 받아들이는 작용을 멈춰버리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여부는 중요치 않다. 이 작업은 ‘보는 법’과 ‘생각하는 법’이 구조적으로 밀접히 연결되는 것을 보여주며, 망막에 의존하여 보는 법의 편협함을 알게 한다.

 

<미친나무>는 한 그루의 버드나무를 중심으로 위치를 이동하여 카메라의 눈으로 포착하고, 이 몇 컷의 사진을 비디오 프레임에 연결하여 재생시키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작가의 위치 변화는 시간으로 전환된다. 시간의 요소를 위치로 대응시키고 있는 것은 작가가 단선적이고, 공간과 분리된 시간관념에 구속받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비디오의 환경요소인 시간의 배치와 간격을 이용하여 작업을 이루고 있는 시간경험이 지각의 한계를 경험하게 하며, 그 과정에서 습관에 얽매이는 구성요소를 떼어내도록 하고 있으며, 그 이전에 무엇을 느끼게 되는지를 묻고 있다.

김도희의 작업이 주로 스스로에게 허용한 규범들에 얽매인 몸을 심리적, 감각적인 자극과 교차시키고 있다면, <미친나무>는 구체적으로 그 얽매임이 발생하게 만드는 몸 자체의 구조적인 모순을 직접 경험하게 한다. 외부를 향해있는 감각기관인 눈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외부세계와 접촉하고 있는데, 그것은 외부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조건에 충실하며, 이 작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조금씩의 변화가 대상의 상에 적용되고 그것을 연속적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순서와 간격을 가지는 조건하에서 눈은 보고 있는 그것 자체와는 무관하게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감각을 통해 대상의 인식에 이르는 과정에서 외부와 접촉하는 그 단계에서부터 한계를 내포할 수밖에 없게 되고, 안다는 것의 불신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작업은 물리적인 움직임과의 다른 현상적 차이를 통해, 그 흔들림이 일어난 곳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수없이 쏟아지고 있는 빛이 만들어내는 흔들리던 대상이 사라진 그곳에서, 내안에서 요동치는 곳은 어디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