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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 작가 작품론>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

최윤정 ●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1. 공명, 생명의식의 만다라

  최근 작가는 활화산 형상의 배꼽을 캐스팅하는 <뱃봉우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배꼽을 캐스팅하는 짧은 시간 동안 참가자들은 차가운 석고가 몸에 붙이는 낯선 경험으로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상황을 마주했을 것이고, 어색한 침묵 내지는 호방한 이야기들로 수다를 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소 기록도 작업의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왔던 작가에게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이후 어떻게 또 다른 서사로 이어질지 사뭇 궁금해진다.

  배꼽은 세상의 중심이자 인체의 중심, 생명이 시작된 자리다. 탯줄을 끊는 순간 지난한 인생의 고역에 서야 하는 생명체로서 그렇게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 그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어머니의 몸을 존재근거로 삼고 그로부터 태어남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시간의 제약을 넘어 이 증거는 원형적 표상으로서 각인되어왔다. 이러한 배꼽을 캐스팅한다는 것, 지문의 형태가 다르듯 배꼽의 형태 또한 다양하므로 우리 모두는 각자가 세상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오름들이다. 기능적으로 잊혀진 흔적기관 ‘배꼽’을 통해서 ‘나의 몸을 관통하는 원형적 상상을 펼쳐놓는 일’은 작가의 연 잇는 작업들을 해석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2012년 진행했던 <만월의 환영>에서 산모의 호흡과 태동에 따라 계속 꿈틀거리는 임신중인 배를 마치 언덕처럼 촬영한 영상을 선보였다. 동시에 바닥에는 둥글게 파놓은 구멍에 모유가 가득 담겨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땅과 온 감각을 일깨우는 듯한 보름달이자 우물이다. ‘우물’은 신화적 상징을 담은 성소로서 다뤄져왔다. 생명이 잉태하는 공간이거나, 건국이나 제의적 장소, 회복과 재생, 신화적 세계로 연결하는 통로 등 탄생과 존재의 긍정성, 삶의 신박함을 담지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가장 원초적 영양분인 ‘모유’가 담겨있다. 마치 여성신 창생설화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 이 모유는 전시기간동안 증발되고 발효되어 공간에 진동하는 생명의 ‘내’를 뿜어내었다. 썩는 것은 변형되는 것, 세포질과 원형질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현상이라 볼 수도 있다. 이 생명의 ‘내’는 어린아이의 오줌을 뿌려 만들어낸 얼룩그림 <야뇨증>(2014)에서 더욱 과감히 실현된다. 오줌 역시도 신체의 작용을 증거하는 생명의 찌꺼기들이다. 그 찌꺼기들이 내뿜는 강렬한 지린내는 직접적인 감각을 넘어 상상계를 자극하는 ‘생명의식’에 맞닿아 있다.

2. 기질을 횡단하는 순환적인 기억

  작가의 서정을 키워왔던 핵심적인 장소, 부산의 영도 깡깡이 마을은 쇳소리 가득하고 현재까지도 밤낮없는 소음과 배를 수리하는 조선소들이 있다. 철비린내와 바다냄새가 뒤섞여 연한 핏비린내가 자욱히 느껴지기도 하는 곳이다. 과거 깡깡이 마을 할매들이 선박의 녹을 제거하거나 붙여있는 각종 오물들을 갈아내듯이, 작가는 지난 2017년 개인전 <혀뿌리>에서 전시장의 벽면들을 갈아내었다. 갈아낸 벽면에는 중첩된 시간들이 노출되었고, 바닥에는 벽면의 가루들이 해변의 일렁이는 풍경을 자아내었다, <살갗 아래의 해변>(2017)은 작가가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내어 다시금 자기 몸으로 그 기억들을 새기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공간에 부유하고 표류했을 분진들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생계를 이끌어야 했던 할매들의 모질고도 굴곡진 시간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 시간과 기억을 후벼 판 듯한 벽면이 아름다우면서도 먹먹했던 이유다. <피속의 파도>(2017) 역시 그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썼던 파란색 유성페인트를 두르고, 생선 비릿내 가득한 상자들을 마치 산맥처럼 일정한 궤적으로 쌓아올린 작업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모습과 습성, 깡깡이마을을 에워싸고 작가 스스로에게 각인되어 있던 정서들을 육화시킨 것이다.

  작가의 서정에 영향을 주었을 조부모의 삶, 어린 시절의 기억, 그때 그곳,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기록과 장면들이 구체적이다. 어쩌면 해결이 안 되는 습성, 삶의 형태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강력하게 되물림되었을 심리적 영향들이 점점이 놓여있는 듯 하다. 또한 그의 작업들에서 일관되게 관찰할 수 있는 ‘육기’에 대해 작가의 의식에 소여된 명확함은 그의 영도시절을 빼고는 쉽사리 논구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작업들은 온전한 자기동일성 안에서만 자신의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없는, 작가가 견지해왔던 태도를 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순환적인 기억들을 숨고르기하면서 자기 정서의 뿌리를 발견하고, 현재의 접근법들에 맥락적으로 닿아있는 지점들을 엿볼 수 있는 작업들이다.

3. 표류하며 실연하는 몸_ ‘소설적인’

  “저를 완결된 텍스트로 판단할수록 그들은 공간과 전시 자체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는 덫을 쳐놓고 미끼노릇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일지 이후의 편지’, 김도희 작가/콘크리트시계(2011)

  그의 몸은 하나의 매질이 되어, 의식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겪게 되는 감각들을 포괄하는 처소이다. 실존의 내러티브가 펼쳐지는 장이자, 작가에게 몸은 ‘변해가는’ 징후로서 자신과 세계에 접속하는 인식코드가 된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 소리지르는 법을 배우고, 그마저도 모자라 형도의 채석장 바위에 누워 온몸을 열어젖히고 흡사 짐승소리 같은 곡소리를 보여주었던 행위에서 작가는 소리통이 된 자신을 느끼고, 그 소리들의 향방- 외부로 향하는 동시에 자기 내부의 찌꺼기들을 모두 발산시키는 듯한-에만 온 감각을 집중시켰다. 우주와 접신하듯이 발산되는 에너지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는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기운을 증명한다. 퍼포먼스는 행위자의 원초적인 정신성을 표현하면서, 주어진 형식이며 모든 것은 즉흥적이고도 우발적이다. 자신이 반응하는 이유들을 발견하게 하는 그의 퍼포먼스는 세계를 인지하는 접촉면을 확장하는 방법이고, 이 접촉면은 그가 예술가로서 세상을 다루는 진정성을 마련해왔다.

  이와 같이 몸으로 체현하는 작업의 내러티브는, ‘과정적인’ 것에서 확장하여, ‘소설적’이다. 그것은 줄거리에 의해서 이미 구조화된 소설이나 담론구조 내지는 확고한 내적 지향성과는 다른 ‘과정적인’ 요소와 ‘우연성’, ‘즉흥성’에 의한 ‘변이가능’을 지지하는 것이자 담론, 생성되어가는 지향성을 일컫는다. 처해진 상황(사건, 장소, 관계 등) 안에서 일상적/특정 장소가 무대가 되어 스스로를 놓아두는 것. 이때 주체는 안정된 작중인물이 아닌 감각하고 실재하고 있는 작가 자신이자, 그저 ‘행위하고’ 그 자리에 ‘존재하도록’ 처하게끔 내던져진 주체이다. 이 주체가 만들어낼 이야기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록들과 관심들을 포괄하면서도 결과를 열어두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 편재해있다. <신치로이드60>(2003)에서 작가는 어린시절부터 계속 복용해야만 했던 약을 약 한 달 간 끊고 장지를 이불삼아 지냈다. 약을 복용하지 않은 대가, 증세로 신체적인 무기력이 몰려왔다. 또한 아픈 감각에 의해 더욱 도드라지고 예민해지는 감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오롯이 몸의 기록이 되어 장지의 주름들로 남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작가가 구하고자 한 것은 죽음, 자해, 부정 따위로 단순화시킨 개념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비유와 소설적인 체험을 통해서, 실존하는 양상을 자기 몸의 반응을 통해 인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벽_잠행_바닥>(2015)은 쇠락해가는 성매매집결지 미아리 텍사스촌, 불탄 집인 하월곡88을 무대로 한다. 작가는 썩어문드러진 장소를 걸레질하며 청소하였다. 보자면 작가가 주로 포착하는 관심사에서 ‘겹, 층위, 습윤, 침착’ 등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몸에 새겨진 흔적이자, 세계에 다가서는 순차적인 단서들을 제공하는 사물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장소에서 채집하는 벽지나 불에 탄 물건들이, 콘크리트를 비집고 올라온 생명력 강한 나무의 엉겨붙은 뿌리들이 모든 것이 멈춰버린 죽음의 장소와도 같은 하월곡88을 쓰다듬고 있는 작가에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걸레를 들고 바닥을 벽면을 닦아내는 수행, 어쩌면 그 무용해보이는 행위들 저편에 작가는 장소가 간직하고 있을 법한 웅크린 기억들을 끄집어내었고, 그 주변의 소리와 대화들을 기록하면서 덤덤히 풀어내었다. 그는 일기를 썼고, 채집을 하였고, 말을 걸었고, 계속 걸레질을 하였다. 그 와중에 과거 자신의 대화들을 기억해내었다.

  18일을 계획하고 14일째 스스로 나왔던 날, 바깥세상의 모든 것들이 발을 디디는 걸음조차도 생소했다던 <콘크리트 시계>(2011)에서 작가는 자신이 세팅해둔 장소에서 14일 동안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도 알 수 없을 불확정한 상태 안으로 자신을 유폐시켰다. 자기 당위로서 발생한 작업들이 놓여진 공간에 거주하면서, 작가는 머무는 동안 몸상태 변화 등을 신체적 기록으로 남겼고, 그 안에서 마주쳤던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방문기록들을 세세히 기록하였다. 14일이 지나자 그에게 장소는 원래의 집에서 지낼 때의 감각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과잉 정보를 처리해내지 못하고 두 손 놓고 있는 멍청한 상태”나 “관계를 단절시켜 죽음을 가속화하려는” 자기 몸의 작용을 인지하면서,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한바탕 몸속에서 소동이 벌어지듯 자신이 무엇을 인지하고 세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존적 윤곽을 찾기 위해 작가는 상황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반응들-자기언어들, 파편들-을 찾고자 고군분투하였다.

  마무리하며

  작가의 주요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작품적 경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글의 제목을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로 했지만, 글의 순서는 거꾸로 간다. <1. 공명, 생명의식의 만다라>는 ‘공명’의 측면에서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 작가의 현 상황을 담는다. 존재의 육기가 죽음과 부패가 아닌 본질적으로 생명을 향한다는 점에서, 그의 전작들을 아우르는 주제의식을 가늠하고, 설화적으로 연결된 원형적 상징들을 통해 확장된 주제와 방법론을 다뤄보았다. <2.기질을 횡단하는 순환적인 기억>은 영향관계와 서정의 시원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작품에서 놓칠 수 없는 ‘기질’과 ‘경향’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 것이었다. <3.표류하며 실연하는 몸_소설적인 체험>은 작가의 퍼포먼스적인 특성이 강한 지점들을 다룬 것으로 자신을 한계점까지 밀고가거나 유폐하는 등 강렬하게 각인되는 작업들을 독해한 것이다. 이를 해석하는 특징적 용어로서 ‘소설적인’을 대입시켜 ‘내러티브-열린’으로서 그의 수행적 행위들을 맥락화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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