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 by Dohee Kim

미친 나무 그리고 신치로이드 60

 

 

미술에 관한 광범위한 오해가 전 지구적으로 범람하고 있다. 미술로서의 가치가 제도의 힘에 의해 전도되는 현상을 넘어, 이젠 미술하는 사람들 자체가 무엇이 미술로서의 가치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본말전도가 보편화되고 있다. 상업주의를 비롯한 미술 안팎의 요인들도 문제이지만, 그 모든 일들이 미술인들에 의해 주도되거나 방치되고 있기에 더욱 유감스럽다. 그러나 미술의 가치와 미술제도 간의 괴리가 깊어질수록 미술의 존재이유와 존재방식이 더 명료해 진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오늘날의 한국미술은 한마디로 변두리 동네미술 수준에 머물고 있다. 현대미술의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지만, 그에 앞서 한국미술계의 현실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한국미술의 한계는 서구미술의 편린들을 모델로 삼아, 비슷하게 생긴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양산하며 동시대미술의 흐름에 손쉽게 편승하려는 무모한 발상에서부터 비롯되어 온 것이다. 한국미술이 세계미술의 주변부에 머물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제 교활한 곁눈질로 한때는 파리와 동경을, 그 후로는 뉴욕의 미술을 커닝해 왔던 해바라기 미술들을 말끔히 청산해야 할 때가 되었다. 서구미술 문맥에는 적지 않은 빈틈들이 산재해 있고, 한국의 청년작가들은 선배들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서구중심주의에 대응할 미술적 대안을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무엇이 대안일 수 있고, 어떻게 구축해야 할 것인가에 있고, 이 문제의 해결방법은 오히려 단순한데 있다. 오직 자신에게 집중함으로써 같은 문제에 관한 다른 생각을 통해 자기 언어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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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지평선 한 가운데 미친 듯 쉴 새 없이 온몸을 떨고 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떨고 있다고 했으나 실은 떨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김도희의 <미친 나무, 2006>는 약간씩 다른 위치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초당 30개의 비디오 프레임 속에 배열하여 흔들림을 연출한, 그야말로 아주 간단한 비디오 작업이다. <미친 나무>의 메카니즘은 이렇듯 단순하지만, 이것이 미술작품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단순한 아이디어나 강렬한 시각적 효과 때문이 아니다. 미술이 주로 시각에 근거하고 있다 해도 시각적인 것이 곧 미술이 아닌 이상, 미술에는 예술적 가치의 성취를 가늠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분별이 동시에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착시는 진실이 아니지만, 지각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특유의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친 나무>는 이 지극히 기계적인 움직임들을 미친 듯 흔들리는 나무로 인식하는 우리의 경험을 낯설게 만들고 있다.

즉 작가는 착시원리를 통해 시간성과 착시현상에 기만당하는 지각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타자화시켜 경험 그 자체에 관해 맹렬하게 저항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친 듯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착시 원리에 숨겨진 경험의 허구를 보며, 삶과 예술의 실체들에 온몸으로 맞서려는 작가의 날카롭고 분명한 의지를 확인한다. 김도희는 이미지를 통해 삶과 예술의 본질적 난제들을 향한 강인한 정신의 실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며, 때문에 우리는 이 작가가 일체의 사유와 경험을 지극히 고독한 궤도 속에서 하나하나 검증해 가고 있음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신치로이드 60, 2003>은 구겨지고 낡아빠진 커다란 장지 한 장이 전부인 작품이다. 신치로이드 60은 갑상선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처방되는 약물로, 작가는 이 약물을 하루에 두 알씩 17년째 복용하고 있다. 이 약물은 갑상선 환자들이 겪는 신진대사 및 혈압 저하, 우울증과 무기력증, 언어장애 등의 고통을 덜어주는데, 작가는 이 약물을 한 달간 끊고 신체적 고통에 맞서 싸우며 이 장지를 깔거나 덮고 생활하며 그 흔적을 담았다.

그러나 실로 끔찍했을 한 달간의 고통은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오직 작가의 기억 속에서만 확인될 경험이 담긴 구겨진 장지 한 장을 우리 앞에 제시해 놓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너덜거리는 종이 이상의 그 무엇을 바라고 있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그래서 결코 독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관람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억지스러운 요구는 김도희의 작업을 설명해 줄 중요한 열쇠이다. 그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그 무엇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과 볼 수 없는 것들은 시각의 한계일 뿐이며, 작가는 이 모순된 요구를 통해 판단의 오류들을 섬뜩하게 자각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미친 나무, 2006>이 착시현상을 통해 실존하지 않는 현상을 강렬하게 경험시키고 있다면, <신치로이드 60, 2003>은 실재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읽혀지지 않는 한계를 인식시키고 있다. 나는 이것을 진실과 기호의 부재를 드러내는 작가의 독특한 어법idiom으로 이해하고 있고, 이 어법이 김도희의 고유하고 독특한 미술의 존재방식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이해하기 바라지만 나조차 낯설어질 때면 호기심이나 친근함보다는 끔찍한 불안함을... 그런 상황 속에서 당황하는 나를 본다. 이러한 불편함의 상태를 단단한 눈으로 당당히 바라보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똑바로 봐야한다. 모든 정서적 혼돈이 있는 곳, 나를 제약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나에게서 죽은 것들은 떨어져 나간다. 안정되고 만족된 상태에서 우리는 그것들이 감금임을 모른다. 그곳에 고통과 근심과 불안의 상태가 드리워질 때, 길들었던 동물이 한순간에 포악한 야성을 드러내듯 생명력이 발현된다. 정서적 내용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반응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死者들의 가르침이 우리를 멀리 이끌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지적 개념과 단순한 관념만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내 몸이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찰나. 대상과 나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움직임이 에너지를 가지며 너와 나, 나와 나는 '함께' 살게 된다.” -작가의 노트 중에서-

 

오상길(작가)